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디김 Oct 20. 2024

세련된 식세기, 여전히 매력적인 수제 설거지

1. 살림과의 대화

요리를 하는 쪽과 설거지를 하는 쪽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언제나 설거지를 선택하는 편이다. 요리에 영 소질이 없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정말이다). 여러 가지 색깔 중에서 딱 골라 초록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단지 설거지를 좋아하는 것뿐이다.


아니 어쩌면 요리가 일을 벌이는 것이라면 설거지는 그것을 정리하고 마치는 것이기에 원체 일을 벌이는 것을 싫어하는 나의 속성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설거지는 ‘행위 자체’에 매력이 있다. 세제를 묻혀 구석구석 닦아내고 물로 씻어내는 기계적인 동작은 나를 차분하게 한다. 복잡한 생각이 정리된다. 마치 요가나 명상과 같은 것이다. 거기다가 깨끗하게 씻겨진 식기들을 볼 때는 성취감과 보람도 느낄 수 있다.      


설거지는 또한 ‘안전지대’를 만들어준다. 사람이 많은 곳이나 시댁에서는 일부로 설거지를 떠맡기도 한다. 그릇은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나도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으므로 때론 그릇들과 있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릇은 나에게 말 대신 고요를 안겨 준다. 설거지 양이 적을 때는 신경을 써서 속도를 늦추는데 그럼에도 어김없이 마지막 식기를 닦게 되고, 그럴 때면 아쉬움이 몰려온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할 말을 생각해야 한다.      


이처럼 설거지는 나에게 그렇게 싫지만은 아닌 집안일이고 때론 나의 도피처가 돼 주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여유롭게 설거지를 즐길 시간이 없어졌다. 할 일이 쌓여 있는 가운데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설거지는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잘 시간이 되어 생각 난 숙제가 된다. 지금도 집 밖에서는 여전히 설거지를 찾아다니지만 나의 일상에서 설거지는 찬밥 신세다.      


늦은 시간까지 설거지를 마치고 자연스레 식기세척기를 검색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즈음 이사 계획이 있던 터라 이사를 가면 제일 먼저 식세기를 들이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친정엄마가 이사선물로 식세기를 선물해 주셨다. 근래에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은 없었다.      


물론 새로 들어온 낯선 친구를 바로 믿을 수는 없다. 수제 노동력을 대체할 이 똑똑한 친구와 탐색의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나의 정직하고도 꼼꼼한 손으로 씻는 것만 하겠어? 최신 가전제품의 정보라든지 기능에 대해 둔한 나로서는 충분히 가질만한 의심이다.      


의심 반, 기대 반으로 설거지 거리를 식세기 안에 넣고 시험운행을 해 본다. 내가 좋아하는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한다. 상단 디스플레이에 ‘1시간 51분’ 소요시간이 뜬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군,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방 안에서 들리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소리까지 좋아, 길다고 생각한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딸깍’하고 식세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수증기가 얼굴을 따뜻하게 감싼다.      


열풍건조까지 마치고 나온 식기들은 뽀득뽀득하고 멋져 보인다. 특별히 물이 좋은 온천에서 온천욕을 하고 나온 것처럼 깨끗한 느낌이다. 설거지를 당하고도 여전히 기름을 두르고 있는 프라이팬도 기름기 없이 담백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건조까지 마친 식기들을 보니 와, 세상은 정말 살만하구나. 내가 어째서 이런 세계를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제 설거지가 힘들어 피했던 요리들도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겠군. 수많은 설거지 거리를 양산하는 복잡한 레시피도 문제없겠어.     


이제 설거지하는 시간은 식세기에 그릇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나는 설거지 시간을 줄인 것에 뿌듯해하며, 5분 안에 그릇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넣기 위해 집중한다. 그릇의 제각각의 모양과 크기에 꼭 들어맞게 정리를 한다. 나만의 '그릇 테트리스'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처음 며칠은 식세기에 그릇들을 정리하는 일이 테트리스에 첫 줄을 없애는 것만큼 재미있었다. 아이들과 남편에게 5분 안에 설거지를 마쳤다고 게임을 깬 아이처럼 기쁨에 차 소리쳤다. 물론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정말 행복한 기분이 솟아났기 때문이다.        


식세기를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과 행복은 지금은 매우 옅어졌다. 무엇이든 익숙해지면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마치 새 집으로 이사 와서 느끼는 첫 3일간의 무작정 기분 좋은 느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새로움에 익숙해져 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새집’은 그냥 ‘집’이 되어 버린다.      


삶이 무료해질 때, 감사할 것이 없고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 마음이 무감각해질 때, 나는 식세기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한다.   

이전 03화 빨래 너는 직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