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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디김 Oct 18. 2024

통돌이군과의 장기 연애

1. 살림과의 대화 

통돌이 세탁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7년 차다. 3년 살고 이사, 그다음 2년 살고 이사, 그 후 세 번째 집에 올 때까지 7년 동안 통돌이 세탁기가 3개의 집을 따라왔다.      


이사를 할 때마다 세탁기는 바꿔야 할 목록 1순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사를 하고 보면 그보다 급한 것들을 먼저 사게 된다. 커튼이나 식탁, 책상, 침대 등 눈에 보이는 것들부터 해결하다 보면 세탁실에 홀로 서 있는 통돌이의 존재는 순위에서 밀려나게 된다. 물론 통돌이 녀석이 워낙 성실히 일을 잘하고 가격에 비해 너무 건재한 탓도 있다.      


문제는 빨래를 말리는 것이다. 활동성 많은 남자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지라 하루에 나오는 빨래의 양이 상당하다. 키워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저 둘은 빨래거리를 내놓는 기계와 다름없다. 그리고 엄청나게 더럽게 옷을 입는다. 뭔가를 먹었다 하면 어김없이 옷에 표시를 해 둔다.(하얀 옷을 입었을 때는 더욱)

      

또한 항상 야외에서 뒹굴기 때문에 자연의 흔적들도 빠짐없이 옷에 남긴다. 그러므로 하루라도 방심을 하여 세탁기의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가는 수북한 빨래무덤, 그것도 생전에 대단한 업적을 이룬 왕의 무덤과도 같은 거대한 크기의 빨래왕릉이 되고 만다.

     

건조기능이 없는 통돌이는 빨래 건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우선 날씨가 화창한 봄이나 가을 같은 경우는 문제가 없다. 베란다에 창문을 열어두고 빨래를 가지런히 널어두기만 하면 빨래는 뽀송뽀송 말라있다. 자연의 햇살과 바람으로 말려진 빨래는 갤 때도 감촉이 매우 좋아 내 마음마저 뽀송해진다.      


문제는 여름 장마철이다. 장마철에 베란다의 빨래는 축축한 습기와 함께 절대로 마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만지지 못하게 꿉꿉한 냄새를 만들어낸다. 화창한 날에 ‘빨래양’의 기분이 햇살처럼 뽀송하고 상냥했다면 습도가 높은 날에 그녀는 무겁게 내리는 비처럼 우중충하고, 번쩍이는 천둥번개처럼 예민하다.

      

이럴 때는 살살 달래어 여왕처럼 대해야 한다. 우선 자리부터 에어컨이 나오는 쾌적한 실내 VIP석으로 업 시켜준다. 실내도 에어컨을 켜지 않는다면 습도는 치솟아 노상과 같은 꼴이니 에어컨을 쉴 새 없이 가동한다. 


습도가 낮아지고 뽀송한 상태가 되면 빨래양의 마음이 풀린다. 그리고 움켜쥐고 있던 습기도 내어준다. '빨래양'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나는 체온과 관계없이 에어컨 바람을 쐬어야 한다. 카디건을 꺼내어 입는다. 냉방병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다시 가을이 온다. 날씨는 쌀쌀해졌지만 건조한 바람 덕에 빨래가 곧잘 마른다. 하지만 가을은 짧고 이내 겨울이 온다.      


겨울도 역시 여름 장마철과 마찬가지로 ‘빨래양’을 거실로 모셔 와야 한다. 겨울철, 그것도 한파의 경우에 ‘빨래양’을 베란다에 방치한다면 그녀는 석고처럼 굳어버린다. 냉동고에 들어간 오징어처럼 널 때 모습 그대로 빳빳하게 굳어진다. 실내의 따뜻한 온도로 그녀의 마음을 풀어준다. 차가워지고 빳빳한 그녀의 마음이 풀림에 따라 몸은 유연해지고 부드럽게 말려진다. 


겨울도 빨래양의 마음을 맞추기는 여전히 어렵지만 여름보다 약간은 너그러운 모습이다. 선심을 베풀어 건조한 실내공간에 가습기 역할을 해주니 장마철보다는 조금은 도움이 된다.(더불어 냉방병의 걸릴 위험도 없다)      


베란다와 거실을 오가며 빨래를 말리는 것은 꽤나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다.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면 뽀송한 옷, 냄새 없는 옷을 만날 수 없다. 수많은 시간을 지나는 동안 나는 ‘빨래양의 비위 맞추기’에 장인이 되었지만 이제 건조기 달린 멋스러운 세탁기를 만나고 싶다.(통돌이군에게 살짝 미안해진다.)  

    

다행스레 이제 더 이상 떠돌이 생활은 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라 정말 통돌이군과 작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듬직하고 튼튼한 통돌이군. 이사 다니는 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며 열심히 일해 준 고마운 녀석. 이제 보내줄 때가 되니 아쉬운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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