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에 다니는 아들이 부러운 이유
2. 내면과의 대화
차가 쌩쌩 다니는 도로 위를 11살쯤 된 여자아이가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구르며 달리고 있다. 그 여자아이는 책 한 권을 사기 위해 도로 위를 달린다.
나의 두 명의 아이 중 한 아이는 미술 학원에, 한 아이는 피아노 학원에 다닌다. 그리고 같은 반 친구들은 거기에 더하여 수학학원, 영어학원, 논술학원 등 여러 가지 학원을 다닌다. 고학년이 되어 갈수록 아이들은 더 많은 학원에서, 더 많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부자이거나 특별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피아노나 미술학원 등을 다니는 아이들은 더 특별해 보였다. 공부 외에도 돈과 시간을 써가며 미술과 피아노를 배우는구나.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책을 좋아했다. 보통 부모님이 책을 좋아하거나 서가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의 놀이터에서 책과 사랑에 빠졌다는 우아한 시작점과 다르게 우리 집은 ‘책의 불모지’였다. 읽을 만한 책이 거의 없었다.
친구집에 가면 그 시절에는 ‘전집’이 유행이었는지 책장에 전집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그러나 전집의 주인이 책을 읽은 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친구와 대화하면서도 책을 읽은 기미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친구집에 놀러 갈 때면 그 책장에 눈이 오래 머물렀다.
무슨 책이 이렇게나 많지?
다닥다닥 붙어있는 책의 제목들을 눈으로 훑어본다. 읽고 싶은 주제의 책에 눈이 오래 머문다. 그렇지만 빌려달라고는 하지 못하고 그대로 집에 돌아온다.
나는 책의 불모지에서 어떻게든 읽을거리를 구해서 읽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거나 용돈을 모아서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있는 서점에 가 책을 샀다. 노래를 부르며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책을 사러 간다. 옆에는 차가 쌩쌩 달리고 있다. 순전한 차도이므로.
중학교에는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특별활동부서인 ‘도서부’에 들어갔다. 성실히 활동을 했는지 도서부장이 되어 학교 도서관 키를 손에 쥐었다. 학교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도서관 문을 연다. 밤새 갇혀 있었던 책 냄새. 아침마다 책 냄새를 맡는 것은 기분 좋은 시작이다. 점심시간에 책의 바코드를 찍으며 친구들에게 책을 빌려준다. 하교 때에는 잊지 않고 도서관 문을 닫는다. 전집의 주인이 아니라 수많은 책의 주인이 되었다.
책은 나에게 공짜로 많은 것을 알려 주었고 학원을 대신해 주었다. 다행스레 어느 정도 공부는 할 줄 아는 아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기소개서의 취미와 특기란은 언제나 만만한 ‘독서’가 전부.
미술학원을 다니는 둘째 아이의 그림을 보는 것은 나의 큰 즐거움이다. 아이가 학원에 가는 날이면 아이의 작품을 기다린다.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내 기준으로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멋지다.
첫째 아이는 피아노를 배우며 오늘은 '캐논'을 배웠어, 엄마와 함께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음악을 연주했어, 하며 연주 이야기를 한다. 나는 소파에 앉아 아이의 연주를 진지하게 듣는다. 그리고 가끔 눈을 감아 심취됐다는 표시를 한다. 그럼 아이는 나의 표정을 한번 살피고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되어 더욱 정성스레 연주를 이어간다.
나도 우리 아이들과 같이 이런 것을 배웠더라면 어땠을까?
나이가 차며 미술이나 클래식을 접하게 되고는 내가 그런 것들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은 수많은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고,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예술가가 만들어 놓은 작품을 접하며 그 안에 들어가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고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
이제 아이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꽤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즐겨하는 아이가 되었다. 함께 미술관에 가서 작품 앞에서 한참 동안 서 있고 클래식 공연도 함께 즐긴다.
요즘에는 첼로연주가 너무 좋아 아이들과 함께 듣다가 좋은 기회가 생겨 첼로도 배우게 되었다. 중고악기상에서 첼로 2개를 구입하였다. 첼로의 가슴을 울리는 선율처럼 아이들이 자기보다 큰 첼로를 가지고 연주하는 것을 보면 또 마음이 저릿해온다.
이런 것들은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다. 아이들이 억지로 어떤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이 동해 즐겁게 그것을 배우는 것. 무엇인가 많이 보고 생각해보지 않으면 호기심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없던 모습들이다.
돌아보면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대신해 무거운 가장의 짐을 짊어진 어머니에게 나는 다른 것을 배웠기에 그런 환경을 탓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미세한 구멍이 난 풍선처럼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학원에 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면 감사함과 행복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감사와 행복이라는 감정의 둘레에 얇은 막이 하나 더 겹쳐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감정은 기쁨과는 다른 쪽에 있는 감정인데 슬프기도 하고 누군가가 보고 싶기도 한 아련한 감정이다. 왜 이런 감정들이 감사와 행복의 감정에 들러붙어 있는 것일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내 아이들 모습 속에 그와 대조를 이루는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오른 까닭이다.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자전거를 타고 도로 위를 달리는 그 소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릴 적 모습들은 더욱 생생해진다. 다른 기억들은 희미해져 가는데 아이들의 모습과 꼭 같은 시기의 모습이 왜 이리 또렷해지는지.
그럴 때면 우리 아이들과 비교되는 외로운 여자 아이 대신 내가 아이들을 꽤 잘 키우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려 애쓴다.
그래, 나는 꽤 괜찮은 부모가 되어가고 있는 거야. 나는 우리 아이들을 통해 어린 시절을 다시 한번 살면 되는 거야.
혼자 책을 읽던 여자아이는 이제 두 명의 장난끼 많은 쌍둥이 친구들이 생겼다. 매일 함께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쉴 새 없이 얘기한다. 새로운 것을 함께 시작하고 서로에게서 배운다. 여자아이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을 다시 한번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