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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엉클써니 Jul 10. 2022

외할아버지 2


그때는 그랬다.


모든 것이 천천히 느리게 흘러갔다.


서울에서 전남 장흥, 외할아버지 댁까지는 


반나절 이상이 걸렸다.




서울 집에서 고속버스터미널까지 1시간 이상,


광주까지 4시간 반,


거기서 장흥읍까지 2시간,


장흥읍에서 버스로 1시간 이상(이것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서 할아버지 댁까지 걸어서 30분 정도...


실로 대장정의 여정이라 하겠다.


차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그렇게 나는 부모님이 계신 서울 집에서


새까맣게 먼 거리에서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외할아버지 댁은 집 뒤로 큰 시내가 흐르고 있었고, 시내를 건너면


우리 엄마와 삼촌 둘 그리고 이모 둘 모두가 졸업한


2층짜리 시골 국민학교가 있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아침 일찍 논으로 밭으로


일하러 나가시면, 점심은 외할머니가 큰 왕골 바구니에


챙겨 두신 것을 꺼내서 먹곤 했었다.


혼자 먹는 점심밥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적막했다.


혼자 밥 먹기 싫은 날은, 냇물 건너 국민학교로


막내 삼촌을 찾아갔다.


4교시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며 운동장에 앉아서


흙바닥에 그림도 그리고,


그것도 싫증이 나면 교실 유리창에 코를 박고


도대체 언제 종이 울리나 초조한 눈빛을 발사하곤 했었다.




수업 끝종이 울리면 부리나케 교실로 들어가서


막내 삼촌 무릎에 앉았다. 깍두기밖에 없는 도시락이


너무나 맛있었다. 주변에 언니들이 나에게 귀엽다며 눈웃음을


보내는 것도 너무 즐거웠다.


나중에 삼촌에게 들은 얘기지만 내가 학교로 찾아올 때면


뭔지 모르겠지만 너무 부끄러웠다고 한다. 


삼촌이 가끔 나를 쥐어박거나 '너네 집으로 가라.'라고 괜스레


짜증을 부리는 날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이것도 막내 삼촌이 중학생이 되어 읍내로 유학 가면서부터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어쨌든 당연히 나도 저 냇물 건너 국민학교를 다니고,


저 학교에서 운동회도 하고, 졸업도 하고,


삼촌들과 이모들처럼 읍내에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겠지,


그리고 큰삼촌처럼 대학에 가고,,,


이렇게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쯤이라고 기억한다.


외할머니는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이제 서울에 있는 국민학교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내일 서울 부모님 댁에 갈 것이고,


앞으로는 부모님과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나는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


그때의 나의 심정을 단순히 실망감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까매져서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날 밤은 7살 인생 처음으로 불면의 밤을 보냈다.


밤새 뒤척거리며 창호지 문살 밖의 달빛도 벌레소리도


모두 그대로 기억나는 밤이었다.


새벽닭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이제는 가야 하는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새벽 일찍부터 서울 갈 채비를 하셨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갔다.


기차 창밖으로 한없이 드넓은 평야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삶은 계란을 사이다와 함께 먹었던 것도 같은데...






서울 집들은 나한테는 성냥갑처럼 보였다.


모두 비슷한 대문, 비슷하게 네모 반듯한 담장들,


나는 우리 집으로 착각해서 자주 다른 집 벨을 누르곤 했다.


진땀이 났다.


집도 동네도 낯설고, 친구도 없고,


부모님도 어색하고, 심지에 한 살 터울의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아이는 아침밥 먹기 무섭게 놀러 나가서 도무지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나는... 외로웠다.


내 친구 삼순이도 없고,


더울 때 올라가서 사과 먹고 책도 보고 시원하게 낮잠도 자던


집 뒤의 큰 팽나무도 없었다.


손, 발이 퉁퉁 불도록 물장구치던 냇물도, 


친구들과 도라지꽃 따러 갔다가 살모사를 만나


기절초풍했던 새카맣게 깊은 뒷 산도 없었다.


그냥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덩달아 내 처지도 너무 달라진 기분이었다.




이제 우리 집은 헛갈리지 않고 찾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지만,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한 달 정도는 우리 반을


찾기가 힘들었다. 


이 반 저 반 기웃거리다 담임선생님을 발견하고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나날을 이어가던 


국민학교 1학년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9시면 잠자리에 들던 시절이었다.


TV에서 어린이들이 잘 시간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면,


나는 동생과 한 이불속에서 잠이 들었다.


낮동안의 고단함에 깊이 잠든 나를 누군가 안아서 일으키는 느낌이 났다.


분명 불을 끄고 잤는데 방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눈이 부셔서 한 번에 눈을 뜨지 못했다.


눈살을 찡그리면서 힘겹게 눈을 뜨는데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었다.


다음 순간, 내 눈 위로 검게 그을리고 깊게 주름진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외할아버지였다.




외할아버지도 나만큼 힘들었을까?


함께 한 시간은 그리움이 되어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손녀 얼굴 한번 보겠다고


오신 것이다.


할아버지는 몇 시간 눈도 못 붙이시고,


아침 일찍 시골로 내려가셨다.


그날 아침, 시골로 내려가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


나의 가슴속에 정지되어 있다.




그 뒤로 나는 시골에서와 마찬가지로


명랑한 소녀로서의 본분을 다하였다.


학교 가는 길에 자주 넘어져서 스타킹에 구멍 내는 것은 다반사,


하굣길에 운동장에서 놀다가 신발주머니나 도시락 가방을 놓고


그냥 집에 왔다가 등짝에 불이 나는  일도 심심치 않았다.


워낙 붙임성이 좋아서 친구도 잘 사귀었다.


속 얘기를 터놓을 단짝 친구도 생겼다. 




그리고,


나에게는 목표가 생겼다.


빨리 어른이 돼서 내가 직접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러 가는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나를 만나러 온 것처럼 말이다.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막막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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