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04. 아무래도 내 달리기의 제철은 여름인가 보오
참 이상하게도 여름이 오면 자꾸만 뛰고 싶어진다. 그러다 슬슬 선선한 바람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흥미가 팍 식어버린다. 뛰기 좋은 가을을 지나 겨울 그리고 봄이 가는 동안에도 겨울잠 자는 곰 마냥 웅크리고 있다가 벚꽃 잎이 다 떨어지고 연두색 이파리가 올라올 쯤부터 다시 뛰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5월부터 러닝에 시동을 걸고 나면 더위가 절정에 이르는 8월에 내 러닝 또한 클라이맥스를 찍는다.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더운 여름날, 왜 굳이 이때 이렇게 뛰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올라오는지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굴의 제철은 겨울, 무화과의 제철은 가을인 것처럼 내 달리기의 제철은 여름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나의 여름의 달리기는 어떤 모양일까. 러닝 하기 싫다고 고해성사하는 글까지 쓴 사람인데 제철이 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순식간에 바뀌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다. 난 여전히 뛰기 직전까지도 뛰지 말까.. 아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불규칙적으로, 3km 정도 짧게, 7분 30초의 페이스로 느리게 뛰고 있다. 하지만 매사에 얕고 얇게 아주 끊길 듯 끊기지 않는 것이 특징인 나는 끝까지 러닝을 놓지는 않았다. 이제 러닝 관둔 건가 싶을 찰나에 또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집을 나서는 나만의 희미한 호흡이 여전히 끈질기게 남아있다. 예전에 주 2회는 반드시 뛰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을 때는 아주 오만상을 찌푸리고 뛰었는데, 같은 주 2 회지만 요즘은 아자아자 기합을 불어넣으며 즐기며 뛰는 단계에 이르렀다. '나와의 약속'이라는 괜한 부담감을 떨쳐 내니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저 러닝 즐기는 사람입니다(아주 약간이지만요).
여름은 러닝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에 제철이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겨울에 제일 못생기고 여름에 제일 이쁘다고 말하곤 한다. 퍼스널컬러가 여름인 셈이다. 여름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팔뚝에 야자수가 있는 바다 그림을 타투로까지 새겼다. 겨울에 태어났지만 겨울은 너무 춥고 그 추운 공기와 싸우느라 잔뜩 몸을 웅크려야 하는 것이 싫다. 바깥일을 끝내고 집으로 마침내 돌아왔을 때 그제야 접어두었던 어깨를 펴는데 그 찌뿌둥한 느낌은 안 그래도 말린 나의 라운더 숄더를 더욱 걱정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여름은 누구나 두 팔 벌려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계절이라 좋다. 뜨거운 태양이여 나에게로 오라!
무엇보다 좋은 것은 저녁이 길다는 것 아닐까? 겨울엔 아주 컴컴한 밤 중에 출근했다가 또 컴컴한 밤 중에 퇴근하는 기분이다. 나보다 늦게 출근하면서 일찍 퇴근하는 이 괘씸한 겨울 해 같으니라고. 정시 퇴근을 해도 어둑어둑한 퇴근길은 러닝이고 뭐고 만사 제쳐둔 채 뜨뜻한 전기장판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여름은 약간 야근을 하고 7시가 넘어 퇴근하더라도 세상이 훤하다. 심심찮게 마주하는 분홍색 노을 녘은 또 어떻고! 공기 중에 습기가 많으면 빛의 파장이 긴 빨간색이 산란을 일으키며 다른 날보다 하늘이 붉게 물든다고 한다. 아무리 습기가 더위의 주범이라지만 역시 모든 건 입체적이라고, 여름 노을 녘을 볼 때면 습기에게 감사한 마음이 절로 우러난다.
며칠 전 퇴근하고 러닝을 하러 나왔는데 유독 습기가 많았던지 하늘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보통은 러닝 할 때, 앞만 보고 우직하게 코로만 호흡하며 뛰는 편이지만 그날은 어떤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시선은 하늘에 고정하고 입은 실실 웃을 수밖에. 붉은 하늘은 어느새 지면까지 내려앉아 세상에 온통 분홍색 필터를 한 겹 씌웠다. 매일 뛰던 공원 둘레길이건만 어쩐지 낯선 곳에 온 것만 같은 기분. 공기마저 몽롱해진 풍경 속을 가로지르며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라면 영원히 달릴 수도 있겠다.
장족의 발전이다. 러너스하이에 대해서 많이들 얘기하는데 난 러너스하이의 실존에 대하여 늘 의구심을 품곤 했다. 30분 이상의 유산소 운동을 했을 때, 엔돌핀과 같은 호르몬 분비로 나타나는 엄청난 행복감을 러너스하이라고 한다. 그동안 30분 이상 달린 적이 꽤 되긴 하는데 단 한 번도 행복하게 끝난 적이 없다. 달린 지 30분이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거다. 와, 이러다 진짜 사람 잡겠다 싶을 때 가까스로 숨을 정리하고서 핼쑥해진 얼굴로 발을 질질 끌며 귀가하는 것이 나의 러닝 마무리였다. 사실 내 심장이 여전히 러닝을 버거워하는 탓에 누군가는 슬로우 러닝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7분 30초 페이스를 뛰면서도 늘 심박수가 170-180 그 어디쯤을 기록한다. 엄밀히 말하면 머쓱하지만 이 심박수는 유산소 운동이라고 부를 수 없긴 하다. 엄청난 고강도 훈련이었던 것이지.
하여튼 극한의 심박수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희박한 확률을 뚫고 엔돌핀이 팡팡 솟아난 것이다. 이것은 분명 붉은 노을의 짓이다. 미친 사람은 이길 수가 없다고 나도 아마 붉은 노을이 뿌려둔 몽롱한 분위기에 홀린 것이 분명하다. 봄도 가을도 겨울도 선사할 수 없는, 오로지 여름만이 줄 수 있는 핑크빛 러닝. 이 날 이후로 여름 러닝이 마치 놀이공원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 세계는 잠시 잊고 꿈과 동화 속 세상을 두둥실 유영하듯 떠다니는 곳. 그렇게 요즘 내 러닝 시간은 노을 직전의 7시가 되었다.
한바탕 뛰고 나면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 끝까지 땀에 푹 젖는다. 러닝을 하기 전엔 내 얼굴에 이렇게 땀구멍이 많은 줄 몰랐다. 거의 뭐 이대로 세수를 해도 될 것 같은 수준이다. 하지만 아직 집으로 돌아가긴 이르다. 뛰진 않지만 살짝 잰걸음으로 한 바퀴를 걷는다. 내리 달리는 것보다 뛰다 걷다 하는 인터벌이 오히려 지방 연소에는 효과가 좋듯이 좀 전에 달릴 때 보다 걸을 때 오히려 땀이 더 난다. 그렇게 한 바퀴 돌며 뛰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주변을 살펴본다. 특히 우리 동네는 애견인이 많아 산책 나온 강아지 친구들 보는 재미가 있다. 또 저녁을 먹고 걸을 겸 나온 가족들, 서로 깔깔 웃으며 사진 찍어주기 바쁜 친구들, 막 알아가는 단계로 보이는 연인들까지. 여름 저녁의 공원은 이렇게 복작복작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1인 가구인 나는 문득 엄마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살핀다. 다들 한낮의 더위와 고단함을 잘 달래고 서로의 곁으로 왔구나.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 아래 즐기는 마지막 한 바퀴는 아까와는 또 다른 평온함이다.
이제 진짜 하이라이트만이 남았다. 바로 한바탕 샤워 후 즐기는 냉침차다. 집에 들어오면 훅 밀려드는 실내 공기에 얼른 씻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열기가 식지 않아 계속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자꾸만 땀이 난다. 하지만 나에게는 냉침차라는 필살기가 있다. 오늘은 어떤 차를 마셔볼까. 선물 받은 최애 얼그레이를 먹을까, 출장 가서 사 온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를 먹을까 고민하다가 구관이 명관이라고 얼그레이를 고른다. 살짝 티백을 우린 후 유리컵에 얼음을 잔뜩 넣고 물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대로 소파로 직행해 선풍기 바람을 쐰다. 이게 지상 낙원이 아니면 뭐람.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순간만큼은 에어컨보다는 선풍기가 어울린다. 몸에 남아있는 물기에 직관적으로 와닿는 바람에 으어어~ 극락의 소리가 절로 나온다. 마치 두 번째 러너스 하이가 온 것처럼 온몸 가득 뿌듯함이 번진다. 크, 오늘 회사 일도 힘들었는데 러닝까지 해내다니. 아주 잘했어! 얼그레이 한잔 해!
어느새 8월의 마지막 주다. 여름 러닝을 즐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물론 기후 위기 때문에 작년에는 9월 중순까지도 한창 더웠다지만 9월은 내게 이 바이브를 주지 못한다.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바짝 뛰어야지 다짐하지만 게으른 러너인 나는 차마 나를 믿을 수가 없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번 연도 제철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을 말이다. 이 한 톨 한 톨의 여름이 아쉬운 내가 부지런히 달리는 것 밖엔 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