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02. 나의 런BTI는 ISFP입니다.
작년 이맘때쯤 독서 모임 지정 도서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었다. 막 러닝 붐이 일던 때였는데 그동안 꾸준히 러닝을 해온 사람도 있었고 나처럼 러닝에 발을 걸쳐 볼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책을 매개 삼아 각자의 러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듣다 보니 각자 선호하는 러닝 스타일이 조금씩 달랐다. 우리 모두 개인의 기호가 있는 러닝에도 취향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런BTI라 부르기로 했다.
먼저 E와 I. 혼자 달리는 것을 좋아하는가, 누군가와 함께 달리는 것을 좋아하는가. 아님 자연 속을 달리는 것이 좋은가, 도심 속을 달리는 것이 좋은가. 이렇게 구분해보자면 나는 명백히 I다. 혼자 자연 속을 달리는 것이 좋다. 정말 신기했던 것이 독서 모임에 참가 중인 어떤 분은 저녁에 선릉역 테헤란로를 달리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저녁이 된 후 도시의 불빛만 남아 있는 텅 빈 도심을 달릴 때 묘한 이질감과 함께 쾌감이 든다는 것이었다. 오.. 그런 러닝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사람은 다양하구나 싶었다.
나는 주로 집 앞 공원 산책로를 달린다. 나무와 숲이 꽤나 울창한데 옆으로는 작은 하천이 흐른다. 우리 동네의 특징이 비둘기가 없고 참새와 까치가 정말 많은데 특히 낮에 달릴 땐 내 뜀뛰기에 놀라 파다닥 날아오르는 새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밤에 달릴 땐 이제 새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퇴근 후 가족들과의 시간을 즐기는 산책인들이 있다. 그들 옆을 스쳐 지나가며 나는 나만의 러닝을 즐긴다.
최근엔 우리 동네에도 러닝 크루가 한두팀 정도 생긴 듯하다. 뛰다 보면 광장에 열 명 남짓 모여 함께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혼자 하는 것보단 둘이 재미있는 취미도 있으니 러닝 크루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러닝 하는 동안 수많은 잡생각을 길바닥에 흘려보내는 나에겐 혼자만의 러닝이 꼭 필요하다. 내게 죄책감 없이 주어지는 자유의 30분이라고나 할까. 이때만큼은 꼭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유튜브나 인스타를 보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리스크도 없다. 뛰는 동안 겸사겸사 잡생각도 하겠다는데 누가 이를 탓하리. 내딛는 한 발 한 발에 잡념을 툭툭 털어 보낸다.
이제 S와 N을 보자. 앞서 잡념이라고는 했지만 나의 실제 MBTI도 ESFJ라 그런지 주로 현실적인 잡생각을 많이 한다. 그리고 음악도 잘 듣지 않는다. 이어폰으로 세상과 단절되는 느낌이 부자연스럽다고나 할까. 그 대신 세상 소리를 듣는다. 뛸 때마다 착지하는 내 발걸음 소리도 좋고 귀 옆을 스치는 바람소리도 좋다.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현실 공간의 한 풍경이 되어 달리는 기분이란!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하는 근원적 의문을 가진 적이 없긴 하지만 이렇게 풀냄새도 맡고 새소리도 들으면서 벅차게 달리는 것만으로 존재의 소명을 다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러닝 하기 정말 싫다고 말하면서도 굳이 또 뛰러 나가는 이유는 이걸로 충분하다.
오늘 러닝 땐 이 생각을 하겠어! 하고 다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이 다 현실적이다. 회사 업무, 자기 계발, 이거 다하고 집에 가서 뭐 하지 등등.. 하지만 가장 많이 하는 건 그냥 주변 지형지물 살피기이다. 공원이다 보니 계절 흐름에 따른 자연의 변화를 틀린 그림 찾기 마냥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요즘은 겨울 동안 이거 얼어 죽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주 바짝 말라비틀어졌던 수국 나뭇가지들에 조금씩 초록빛을 돌기 시작했다. 그중 성격 급한 녀석들은 벌써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봉우리를 빼꼼 꺼내기도 했다. 벚꽃은 하루가 다르게 피어났다. 겨우 한 두 송이 피어있던 벚꽃은 요 며칠 안 뛴 사이에 거대 팝콘으로 만개했다. 늘 앞만 보고 뛰던 길을 하늘을 보며 뛴다. 밤인데도 벚꽃 가득한 하늘은 환하다.
T와 F는 어떻게 러닝에 대입해 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기록을 대하는 나의 자세로 나눠보기로 했다. 조금씩 기록을 단축시키며 성장해 나가는 T와 기록보단 뛰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F로 말이다. 나는 원래 T였다가 F로 바뀌었다. 처음 런데이를 시작했을 때는 그놈의 5분대에 꽤 집착했었다. 런데이 초보자 코스의 경우, 뛰는 구간과 걷는 구간이 따로 있고 레이스를 마쳤을 때 페이스도 구간별로 다르게 집계된다. 당시 전체 페이스는 9분대였으나 뛰는 구간 페이스는 5분 40초 정도였다. 달리기 초보인 내가 1키로 페이스 5분대라니.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똑똑히 안다. 그냥 냅다 전력질주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고작 3분 내외로 뛰는데도 헉헉 거리며 얼른 이 뛰는 구간이 끝나기만을 빌었다. 걷는 구간이 오면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느라 허리는 무너지고 다리를 질질 끌며 걸었다. 그러다가 다시 뛰는 구간이 오면 한숨부터 나왔다. 내가 지금 나태지옥에 빠진 건가, 또 뛰어야 한다니 하며 억지로 뛰게 되었다.
이러니 러닝에 흥미가 붙을 턱이 있나. 그러다가 하루는 걷뛰걷뛰 하지 말고 한번 달릴 수 있는 만큼 쭉 달려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성격이 급한 탓에 이렇게 3분씩 뛰어서 언제 30분을 내리뛸 수 있겠냐며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그날은 한번 각 잡고 페이스를 늦춰 달려보았다. 오, 나쁘지 않은데? 물론 처음으로 마의 5분을 넘겨보는 거라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이대로라면 쭉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8분을 쉬지 않고 뛰었다. 30분도 거뜬히 달리는 지금 기준에서 생각하면 정말 귀여운 숫자지만 그날의 성취감은 잊을 수 없다. 내가 8분을 내리 달리다니! 그 성취감이 마라톤 신청까지 이끈 것이다. 지금 나의 1키로 페이스는 보통 7분 30초다. 여자들도 6분 30초 정도로는 뛰던데 솔직히 내가 느린 건 사실이다. 남들보다 키가 작으니 다리도 짧아서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나름 합리화해 본다. 하지만 7분 30초 페이스도 내 심장에겐 많이 벅찬지 평균 심박수가 170을 찍는다. 심장이 터지는 것보단 느린 게 나으니 내 페이스를 나라도 사랑해야지, 별 수 있나. 요즘 들어 느끼는 건데 점점 내가 나를 많이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이런 내가 나쁘지 않다.
이제 마지막 J와 P다. 정해진 코스를 좋아하나요, 새로운 코스를 개척하기를 원하나요. 난 내가 무조건 J라고 생각했다. 왠지 새로운 코스로 가게 되면 길도 잘 모르고 사람들 잘 걷고 있는 길에 괜히 내가 난입하는 것은 아닐지 머쓱할 것 같기도 하고.. 여러모로 망설여졌다. 그래서 늘 공원 산책로 그 코스만 뺑뺑이를 돌았다. 산책로 1바퀴는 1km를 조금 넘는다. 이를 깨달아버린 순간부터 불행 아닌 불행이 시작되었다. 자꾸 맘 속으로 '아, 이쯤 되면 3km 됐겠는데? 왜 워치가 알람을 안 주지?' 하면서 스마트워치를 괜히 쳐다보게 된다. 어련히 3km가 되면 워치가 알아서 알려줄 텐데 굳이 눈으로 거리를 확인하고 나면 '아직 이것밖에 안 됐어?' 하며 또 마음이 팍 상한다. 앞서 내가 나를 많이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막 말했는데 취소. 나 진짜 왜 이럴까.
런BTI P의 세계로 입문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점점 해가 길어져 퇴근하고도 저녁이 밝아진 덕분이다. 동네 공원은 위쪽 산책로와 하천 바로 옆 아래 산책로가 있는데, 그동안 하천 산책로는 어두컴컴해서 뛸 생각을 못했었다. 그러다 밝은 저녁에 하천 산책로를 뛰고 있는 사람들을 보다 보니 나도 이제 한번 내려가봐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이곳에 이사 온 지 9개월 만에 말이다. 5km 완주를 위해 빙글빙글 돌아야 했던 위쪽 산책로와는 달리 하천 산책로는 계속 하천을 따라 길게 이어져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마땅히 피크닉 할 장소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래로 내려와 보니 곳곳이 피크닉 명소였다. 적당히 도톰하게 깔린 잔디밭, 벤치와 정자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몰랐던 징검다리도 보고 오리 가족까지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구경하면서 뛰다 보니 힘든 줄도 모르고 아주 가뿐히 5km를 깨부수었다.
맞아, 나 새로운 거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통영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대학을 와 가장 좋았던 것은 19년 동안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일들이 끊기지도 않고 매일같이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캠퍼스의 분위기, 동대문 의류 상가, 홍대의 클럽 문화, 강남대로의 불빛, 반포한강공원의 무지개 분수. 그리고 우리 학교는 외국어 전공이 많아 축제 때마다 각 언어과 부스별로 그 나라의 음식을 팔고 문화 체험 이벤트가 있었다. 그 모든 생경함을 스펀지처럼 쑥쑥 빨아들인 20대의 내가 지금도 사무실 밖 취미활동에 진심인 30대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거 다 예전에 해본 거야' 또는 '그거 안 해봐도 알 것 같아'라고 자만하며 스스로를 안일하게 가둬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아는 맛은 아는 거라 맛있는 거고 새로운 맛은 새로워서 더 맛있는 건데, 세상은 넓고 또 넓은데 말이다. 그렇게 매일 보던 하천 산책로가 러닝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이로서 나의 런BTI는 ISFP다. 홀로 내가 뛰는 이곳을 느끼며 나의 페이스에 따라 새로운 곳을 개척해 나가는 러너. 러닝에 대입해 본 건데 어딘가 익숙한 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인의 삶을 살며 회사에 매여있긴 하지만 그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 알록달록한 순간순간을 찾아보는 '방과 후 직장인'. 정말 진부한 말이지만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니까, 지금처럼 발 딛고 있는 하루를 채색하며 살아가는 게 꽤나 즐겁다. 그것이 내 눈에만 반짝일지라도 내가 좋으니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