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04. 때 묻고 상처 난 마음을 꼼꼼히 닦아내요
오늘 무슨 날인가. 어쩜 이렇게 짠 것처럼 다들 나를 찾을 수가 있지. 여기서 전화, 저기서 메일, 이제 메신저까지. 일이 하나씩 착착 차례대로 와주면 좋으련만 꼭 일은 항상 우수수 몰려서 온다. 앞선 업무가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급한 업무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업무 다이어리 To-do list는 터져나갈 지경이다.
하필 파트장도 없는 날이라 상무님께 혼자 직접 보고도 하러 다녀오고 오늘까지 납기인 취합 업무들도 쳐내다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 나에게 정시 퇴근은 먼 나라 얘기다. 당장 급하게 만들어야 하는 보고서가 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저녁 6시에 유관 부서와 만나 전략을 짜고 다시 흩어져 각자의 자료를 만들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11시다. 이 큰 사무실에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다. 이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 프로님, 언제 집에 가세요? 그냥 내일 와서 해요. 우리.
같이 고생 중인 유관 부서 동료의 메신저. 휴, 그래. 지금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이미 따갑게 시린 눈과 지끈대는 머리는 한계에 다다랐다. 그렇게 동료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집을 가는 동안에도,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자기 직전까지도, 머릿속엔 일에 대한 걱정들로 가득했다. 혹시나 이게 또 잘못되면 어떡하나. 내일 파트장님께 이 보고는 꼭 드려야겠다. 아, 맞다. 이런 부분도 고려해야 했었는데 내일 다시 봐야겠다. 나는 걱정이 많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잠이 쏟아진다. 그렇게 울렁이는 속으로 잠에 들었으니 편히 쉬었을 리가 없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먼저 떠졌다. 일어나자마자 한숨부터 푹 나왔다. 오늘 내 하루가 어떨지 이미 예상이 가기 때문이다. 인상을 팍 쓴 채 출근 준비에 나섰다.
이 업무 폭탄은 이주 내내 지속 됐다. 일을 하다가 숨이 찬다는 생각을 한 게 얼마만이었더라. 정신 차리면 저녁 6시고 이제 좀 다 했다 싶으면 8시였다. 에너지가 쭉쭉 빠지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얼마 남지 않는 에너지를 어떻게든 한 방울이라도 더 쥐어짜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 정말이지 사무치게 그리웠다. 요가, 요가, 요가. 정말 요가하러 가고 싶었다. 그렇게 어느 목요일이 되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저녁 7시 40분 요가 수업을 신청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놈의 일이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근데 이 수업에 안 가면 딱 내가 끝날 것 같았다. 아직 To-do list에 펄떡펄떡 숨이 붙어 있었지만 어차피 내가 끝나버리면 이것도 못하는 것 아니겠나.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과감하게 노트북을 덮고 퇴근을 찍었다.
요가 가는 발걸음은 늘 가벼웠는데 이 날만큼은 천근만근이었다. 혹시나 회사에서 또 전화가 오진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정문까지 빠져나온 마당에 다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선택지는 요가 하나밖에 없었다. 무거운 발걸음이지만 우직하게 요가원으로 향했다.
요가원에 들어서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약간 낮은 조도에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매트 위에서 조금씩 몸을 푸는 회원님들과 차를 우려내고 있는 선생님. 여전히 요가원은 이곳의 질서를 간직하고 있었다. 사무실의 밝은 형광등에서 벗어나 요가원의 주황색 간접등 안에 온 것만으로 마음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출근할 때 입었던 옷을 벗고 요가복으로 갈아입었다.
요가복이 유난히 내 몸에 착 달라붙었다. 어디 푹신한 이불에 폭 안긴 것만 같았다. 요가복도 나를 위로해 주는 걸까. 그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며 매트 위에 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나 또한 이리저리 몸을 풀었을 텐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차를 홀짝이며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산책로를 따라 하루 일과를 끝낸 사람들이 저마다의 소중한 이와 함께 걷고 있었다. 낮 기온은 10도 가까이 오르지만 해가 지고 나면 아직 꽤나 추운 3월의 초입. 연신 옷깃을 여미면서도 얼굴엔 희미한 웃음이 묻어있었다. 저 멀리는 자동차 불빛이 어른어른 보였다. 하얀빛과 빨간빛이 밝게 다가오기도 하고 빠르게 멀어졌다. 정말 자동차가 많기도 하지,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요 근래 메모리의 100%를 꽉꽉 채워 돌리던 머리를 생각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다 보니 그 순간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차가운 바깥공기와 단절되어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 속에 요가복을 입고 앉아있는 나. 맞다. 원래 퇴근하고 이렇게 살았었지.
몽상에 잠겨있던 정신이 떠오르고 나니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감사한 하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고생을 견디고 무사히 이곳까지 와준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순간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다 괜찮아졌다. 오늘 하루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도, 내일 해야 할 일에 대한 걱정도, 다음 주에 있을 보고도, 내 안에서 스르륵 녹아서 사라졌다. 모두 다 괜찮아졌다. 내가 지금 이곳에 와있으니 말이다. 이것만으로 충분히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요가의 효능은 바로 '정화'다. 어릴 적, 아빠가 퇴근하고 집에 오시면 집에 있던 가족들이 나와서 꼭 얼굴을 보고 인사하는 것이 우리 집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아빠가 고단한 하루 속에서 묻히고 온 먼지를 온 식구가 나서서 탈탈 털어주려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1인 가구인 나에겐 이 먼지를 털어줄 가족이 없지만 그 대신 저녁 요가가 있다. 따뜻한 목욕물에 풍덩 들어간 것처럼 때 묻고 상처 입었던 마음이 다정한 온기에 저절로 풀어진다.
수업은 늘 명상으로 시작한다. 사무실에서 초조함에 빠르게 뛰었던 심장을 다독인다. 몰아치는 업무에 차올랐던 숨을 깊은 심호흡으로 다스린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또 들이마시고 내쉬고. 명상 후엔 본격적인 요가에 앞서 스트레칭을 한다. 처음 할 땐 다리도 잘 안 펴지고 허리도 잘 굽혀지지 않는다. 그동안 회사에서 앉아만 있느라 종아리가 굳고 허벅지 뒷 근육도 잔뜩 짧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흡을 하면서 조금씩 1mm씩 끈기 있게 늘려가 본다. 그러면 어느새 아픔보단 시원함이 느껴진다. 늘어난 근육만큼 쪼그라들었던 마음 또한 다시 부풀어 오른다.
본격적인 요가 시퀀스에 들어가면 플로우에 맞춰 동작을 물 흐르듯이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기자세에서 다운독, 다운독에서 이마무릎, 이마무릎에서 헤드업, 헤드업에서 합장, 합장에서 플랭크, 플랭크에서 차투랑가, 차투랑가에서 코브라까지. 딱딱하게 경직되었던 몸과 마음이 이제는 넘실넘실 흘러간다. 특히 모니터와 책상을 향해 쏟아졌던 상체를 하늘로 마음껏 펼쳐낼 때는 이제야 비로소 숨이 탁 트이는 듯하다. 업무 걱정은 잠시 잊고 오로지 요가 한 동작 한 동작에 집중하며 자유의 경지로 올라가는 것이다. 요가에 심취해 몸을 움직이고 나면 끝날 때쯤엔 온몸이 땀이다. 내 안에 있던 나쁜 기운이 빠져나간 것이라 생각하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새벽 요가를 할 때에는 아무리 좋은 에너지로 채우고 가도 회사에 가는 순간 눈앞의 걱정이 덕지덕지 묻어 속상할 때가 많았다. 요가를 하던 중에도 출근이 곧이니 업무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녁 요가는 다르다. 요가를 하는 동안 아주 정성스럽게 마음을 닦고 또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암만 마음에 검댕이를 잔뜩 묻히고 왔더라도 평화로운 요가원 분위기로 달래고, 부드러운 요가복으로 닦고, 수련으로 잘 헹구고 나면 반짝반짝 윤이 나는 투명한 마음이 된다. 고이 잘 간직하고 싶은 나만의 수정 구슬. 이 마음은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용기가 되어 날 다시 웃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