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멸시에서 벗어나기
삶 속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위기와 벽을 만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운명 앞에 우리는 자신의 힘의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의 늪에 빠진다.
그리고 자기 안에 부정적인 감정들을 해결하기보다는 억누르고 억압한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그 감정들을 해결할 시간을 내거나 해결 방법도 강구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라 일시적 쾌락으로 문제를 회피하면서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그 해결 방법을 찾는다.
또한, 앞으로 다가올 상처를 방어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발동시킨다. 쉽게 만들어내는 미성숙한 방어기제에는 억압(감정을 무의식에 밀어 넣기), 반동형성(정반대 행동으로 감정 억제), 투사(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귀속), 퇴행(어린 행동으로 회귀), 부정(현실 수용 거부), 지성화(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만 접근), 합리화(자신의 행동이나 감정을 정당화) 등이 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 이 방어기제들은 결국 자신의 내면과 직면할 기회를 빼앗는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은 점점 무의식 속을 파고들어 마치 자취를 감춘 듯 있다가, 서서히 몸집을 키워 그 부정적인 감정에 자신을 내어주고 만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의식 속 깊이 내재된 고통을 직면할 용기를 가지고, 이성적으로 고통의 원인을 파헤쳐야 한다. 대개 원인은 과거의 경험에서 오는데, 그 과거 속의 나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자기 이해는 자신을 바꾸는 노력이 아니다.
자신을 이해함으로써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나아가 자신을 수용하는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눈앞에 던져진 과제들을 처리하느라, 이런저런 구실로 나를 돌보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나로 사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그 두려움은 오랜 세월 겪은 실패와 상실, 상처와 함께 켜켜이 쌓여 내 무의식 속에 깊게 뿌리내려 있었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잡고 상처를 더 키웠다. 약해지는 나를 부정하며 내가 느끼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기만하며 강하고 센 척하며 나 자신을 방어했다. 나는 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삶은 행복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를 포기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포기한 삶은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할 힘을 주지 못하며 자신이 누릴 행복의 권리마저 누리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꿈꿀 수 없게 만들고 여러 인생의 선택들 앞에서 우왕좌왕하며 결국 자신의 삶을 살 기회를 놓치게 된다.
나는 더 이상 책임을 회피하고 권리를 잃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행복할 용기를 냈다. 그 용기는 나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동안 두려워서 회피했던 나의 내면을 직면하게 되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고통이라는 감옥에 갇힌 나를 발견했다. 과거의 고통 속에 짓눌린 가여운 나에게 위로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구할 수 있었다. 나를 가여워하고 보살핌으로써 나는 나와 화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수고했다고,
그런 긴 방황도 너를 알아가기 위한 시간이었으며,
결코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고,
돌고 돌아 결국 너로 다시 돌아왔음을
환영한다고..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는 실패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고통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그 고통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온몸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고통 속으로 매몰되어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수용하고 직면할 용기를 내야 한다. 항상 자신을 다독이고 사랑해 줘야 한다. 그래야 온전히 나로 살 수 있다.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돌보고, 자신을 연민하며 자신에게 친절할 수 있다. 자기 연민은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방어기제인 자기 동정과는 다른 것이며 자신이 겪은 고통을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이다. 자신을 고통에서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이다.
그리고 고통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감은 결국 자기를 진정으로 이해해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행복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