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끝자락에 도착한 이스탄불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비에 다 젖은 캐리어를 이끌고 도착한 우리의 숙소는 재미있게도 원통형의 건물이었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오르자 에어비앤비에선 예술가라는 튀르키예 여자 호스트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침실 창밖으로는 칠흑 같은 바다가 보였다. 짐을 풀고 한숨을 돌리니 이 낯선 방이 어쩐지 아늑하게 느껴졌다.
그날 밤은 일찍 잠들었다. 그러나 나는 새벽 5시,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기겁하며 깨야 했다. 정신없이 자다 일어나 여기가 어디인지도 순간적으로 파악이 안 되는 상태에서, 바깥 어딘가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남자 목소리가 엄청난 음량으로 들려오는 상황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물론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 되었다. 조금씩 정신이 들자 여긴 이스탄불이고, 나는 대다수가 무슬림인 국가에 여행 왔으니 이들의 일상인 새벽 기도 소리를 들은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슬림들이 하루 다섯 번 기도를 한다는 걸 아는 것과, ‘아잔’이라고 불리는 이슬람 기도가 내가 자는 시간에 어떤 방식으로 들려올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은 다른 얘기다. 아잔 소리에는 바로 적응해 다음 날부터는 새벽 5시에도 깨지 않고 잘 잤지만, 여행을 하면서 문화 차이로 인해 이렇게 깜짝 놀랄 일이 평생에 몇 번 있을까 싶은 해프닝이었다.
튀르키예는 내가 처음으로 여행한 무슬림이 대부분인 국가였다. (공식적으로 튀르키예는 국교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세속국가이므로 ‘이슬람 국가’라기보다는 ‘무슬림이 대부분인 국가’라고 칭하려 한다.) 이스탄불의 박물관과 사원의 건축양식, 내부의 화려한 금빛 장식과 이국적인 색감, 다채로운 문양, 뿐만 아니라 거리에서 파는 카펫의 디자인이나 카페의 찻잔까지, 그곳엔 새로운 종류의 아름다움이 존재했다. 미와 웅장함을 표현하는 새로운 문법이었다. 내가 몰랐던 차원의 아름다움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 건 정말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아야 소피아 사원이었다. 내가 방문했던 2019년 당시 이곳은 ‘아야 소피아 (혹은 성 소피아) 박물관’이라고 불렸는데 이후 ‘아야 소피아 사원’으로 명칭이 바뀐 데에는 사연이 있다. 이스탄불은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깊은 역사와 다양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아야 소피아는 이스탄불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였던 시절, 537년에 정교회 대성당으로 건립된 후 오랜 세월 제국의 정교회 본거지로서 큰 역할을 했다. 그러다 1204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해 아야 소피아를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했다.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탈환되면서 아야 소피아 역시 정교회 성당으로 정체성을 되찾았지만, 1453년 오스만이 도시를 함락하여 이때부터 이슬람 모스크가 되었다. 건물 자체는 유지되었지만 성당 시절의 성화는 회반죽으로 가려졌고 대부분의 장식뿐만 아니라 기능 자체가 이슬람으로 바뀌었다. 아야 소피아 사원의 내부에는 이와 같은 복잡하고 치열했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덧칠되었다가 나중에 발굴된 성화뿐만 아니라, 정교회 시절 예루살렘 방향에 맞춰 지어진 제단의 일부와 그 아래 메카의 방향에 맞게, 건물 전체의 방향과는 살짝 어긋나게 새로 지어진 이슬람 제단과 같은 것들은 정말 흥미로웠다.
한편 튀르키예의 초대 대통령이자 우리에게 ‘케말 파샤’라고도 잘 알려진 국부 케말 아타튀르크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한 만큼 정교분리와 세속 정책을 중요시했다. 아타튀르크는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아야 소피아 사원을 봉쇄했다가 1935년 2월에 이곳을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개칭하고 개방하였다. 아야 소피아가 역사의 풍파를 거치며 다양한 종교의 거점이 되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그 세계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 것이다. 또한 무슬림이 아닌 사람에게도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개방했고 입장 시 신발을 벗어도 되지 않게 규정을 바꾸는 등, 모스크에 적용되는 규칙을 없앴고 종교행위 자체를 금지해 역사를 보존하고 공유하는 박물관의 기능이 충실히 행해지도록 했다. 따라서 바뀐 것은 이름뿐만이 아니라 역사를 보는 관점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어떤 공간이 절도 되었다가, 교회도 되었지만 지금은 이 두 정체성 모두를 수용하고 중립적인 박물관으로 남겠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어찌 보면 파격적인 논리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은, 튀르키예의 극보수 리더로 평가받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2020년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다시 모스크로 공식 개칭했다는 것이었다. 문화와 역사의 다양성을 인정하기보다는 튀르키예의 정체성을 이슬람 공동체로 확고히 하려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으니, 국제적으로 종교계의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이스탄불은 다이내믹한 역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 특징도 재미있다. 튀르키예를 동서양의 관문이라고 부르는데 이스탄불은 그야말로 동서양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있어서, 도시의 오른쪽은 아시아 대륙, 왼쪽은 유럽 대륙에 속한다. 경계가 되는 것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한 다리 위에 서서 아시아 대륙 방향을 바라보며,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일이나, ‘우리’와 ‘이방인’을 구분하는 행위 같은 것이 이스탄불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궁금해졌다.
거리의 모습도 그랬다. 이스탄불의 시내는 유럽식 건물이 흔했지만, 이곳저곳 보이는 모스크의 높은 첨탑과 둥그런 지붕이 분명 유럽 풍경은 아니라는 점을 되새겨줬다. 음식은 향신료와 채소를 많이 사용해 유럽 음식보다 내 입맛에 잘 맞았다. 동양이라고 할 수도 있고 서양이라도 할 수도 있는 또 다른 점은 튀르키예의 언어다. 우선 이들의 문자는 라틴 알파벳을 조금 변형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국명 ‘튀르키예’는 ‘Türkiye’, 이스탄불 시내 한 구역인 ‘탁심’은 ‘Taksim’이라고 쓴다. 과거에는 아랍 문자를 차용해서 쓰다가 튀르키예의 발음과 아랍 문자의 발음이 정확히 맞지 않는 문제가 있어 케말이 1927년 이와 같은 라틴 문자를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말 자체는 우리말과 몽골어와 먼 조상을 같이 한다고 한다. 유럽어와 달리 한국어나 일본어처럼 주어-목적어-동사의 어순을 가진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스탄불의 추억을 담아 그린 일러스트. 길거리에 고양이가 정말 많아서 꼭 같이 그려주고 싶었다.
12월 31일 밤, 친구 메이와 나는 새해 카운트 다운을 이스탄불 최대 번화가인 탁심 광장에서 구경하려 했다. 그런데 자정이 가까워지자 거리는 돌변했다. 낮에 봤던, 아니 전날 밤에 봤던 그 거리가 아니었다. 새해 전야의 이스탄불 번화가는 들뜬 인파로 가득했는데 99퍼센트의 남자와 1퍼센트의 여자(그마저도 관광객인 듯했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스탄불 현지의 여자들은 새해 전야를 탁심 광장에서 보내지 않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했다. 어떤 남자들은 일종의 새해 전야 세리머니 같은 것인지는 몰라도 환호성과 포효의 중간쯤 되는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거리를 빽빽하게 채운 남자들이 한 방향으로 행진하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동아시아 여자 두 명이었던 메이와 나는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여행하는 동안 식당이나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이 대부분 남자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관광객인 내가 봤던 풍경은 그러했는데 화이트칼라 직종에는 여자가 많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지나다니는 사람 중 이토록 절대적 다수가 남자인 곳은 본 적이 없었다. 전에 없이 메이와 팔짱을 끼고 광장을 향해 걸어가는데 결국 누가 내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는 어리둥절함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으로 그렇게 새해를 맞이했다. 밤하늘에는 2020년을 알리는 불꽃이 찬란한 자수를 놓았지만 나는 이 광경을, 이 도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조금 슬퍼졌다.
다음 날 아침, 새해를 맞이한 이스탄불 거리는 전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새침하고 고요했다. 나는 이스탄불이 가진 역사와 이곳에서 마주한 크고 작은 문화충격들, 이 도시가 가진 다양한 색깔과 단층에 압도당한 느낌이었다. 얽히고설킨 저만의 이야기를 가진 역사 깊은 도시를 고작 며칠간 둘러본다는 건 그래서 오만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행은 계속되어야 했다. 나는 이스라엘 텔 아비브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