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를 가장한 나라는 소비자
어느 초겨울의 주말, 벨기에 브뤼셀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 브뤼셀에 숙소 말고는 크게 계획한 것이 없는 상태로 도착했다. 낯선 도시에서 남의 아파트를 며칠이나마 내 집으로 삼고 이리저리 동네구경이나 하면서, 벨기에에서 유명한 감자튀김과 와플을 먹어보는 그런 여행을 원했다. 그래서 브뤼셀에서의 주말은 특별한 이벤트 없이 지나갔다.
가장 큰 사건은 감자튀김이 정말 맛있어서 깜짝 놀랐던 일이다. 그런데 고작 3유로 정도 하는 감자튀김 하나를 먹기 위해 구글지도의 리뷰가 좋은 가게를 찾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갑자기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여행이 주는 서프라이즈나 모험의 즐거움이 나를 찾아오지 못하도록 안전하고 확실한 선택만 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3유로를 헛되이 쓰는 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아무 가게나 시도할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새로운 곳에 가서 집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익숙한 곳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 여행이라면, 나는 여행의 의미를 내 맘대로 비틀어서 여행을 즐겼다. 새로운 풍경을 보고,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생활상을 구경하는 것은 물론 재미있지만, 나는 내 입맛에 맞는 음식과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상식, 나의 컴포트존이 그곳에도 있기를 바라며 새로운 곳으로 떠났던 게 아닐까. 예를 들면 나는 벨기에인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아침식사나 외식할 때 즐겨 먹는 메뉴 같은 것들을 시도해 볼 생각은 하지 않고, 내게 익숙한 것, 감자튀김, 와플, 홍합요리만 먹고 왔다. 그나마 홍합은 계획에 없었던 건데, 크리스마스 마켓에 구경 갔다가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어서 메뉴판에서 익숙한 걸로 골랐다. 도대체 뭐가 무서워서?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고 자주 생각해 왔는데 엄밀히는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일하기는 싫고 돈 쓰기는 좋아서 여행하는 순간이 좋았던 것뿐이었다. 여행에서 음식은 나에게 중요한 부분인데, 메뉴를 고를 때 실패하지 않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서 많은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지 못한다. 배고플 때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이름은 처음 들어보지만 그곳에선 가장 인기 있는 메뉴를 시키면 배탈이라도 나는 줄 안다. 오히려 고르고 골라 간 식당일수록 실망할 확률이 큰데도 말이다. 그래서 브뤼셀 여행은 계획 없이 그냥 편한 마음으로 쉬다 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현지에서는 흘러가는 대로 나를 내버려 두지 못하고 틈날 때마다 구글지도만 들여다봤다. 내 상상 속의 나는 릴랙스 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여행자였다면, 현실의 나는 혼자라서 더 편협해지기만 하고 하루하루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전전긍긍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런 여행도 있고 저런 여행도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브뤼셀 여행은 감자튀김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나에겐 나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왜 여행 왔지?’라는 물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이유는 진짜 ‘집 밖’으로 나온 것 같지 않은 이상한 기분 탓이었다. 나를 마음의 집 밖으로 꺼내줄 무언가가 없으면 여행지에서 나는 진정한 여행자가 아닌, 그저 모아둔 돈을 쓰는 어떤 소비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