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와 이스라엘을 묶어서 여행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는 몇 가지가 있겠다. 첫째, 지리적으로 인접하지 않다. 둘째, 언어도 통화도 다르다. 셋째, 무엇보다도 튀르키예는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이 무슬림이고, 이스라엘은 70퍼센트가 유대인, 17퍼센트가 무슬림이다. 튀르키예는 무슬림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나라라면, 이스라엘은 유대교와 이슬람의 지난한 갈등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3일, 이스라엘 텔 아비브에서 3일을 여행하기로 결심한 건 함께 한 대만인 친구 메이의 영향이 컸다. 메이는 포르투갈에서 공부하다 독일에서 인턴십을 하고 있는 중이었고 틈날 때마다 여행을 정말 열심히 다니는 아이였다. 우리는 연말과 새해를 맞아 작은 여행을 계획하기로 했는데 메이가 유명한 유럽 관광지는 이미 다녀와 봤기에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웬만한‘ 목적지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색다른 여행을 원했던 우리는 베를린에서 이스탄불로 날아가 새해를 맞이하고, 이스탄불에서 텔 아비브를 거친 뒤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오는 일정을 짜게 되었다.
텔 아비브의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하자 내가 또 다른 세계관에 와있다는 것을 바로 실감하게 되었다. 검정 코트에 중절모 등 정통 유대교식 옷차림과 옆머리를 길러 양갈래로 땋아 내린 헤어스타일 ‘페오트’ , 간혹 어린 남자아이들도 쓰고 있는 정수리만 살짝 가리는 작은 모자 ‘키파’ 등의 모습은 나에겐 정말 새로웠다. 어디에 가서 사람들의 의복에 놀란다는 사실을 보니 내가 여전히 모르는 바깥세상이 아주 큰 모양이다.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텔 아비브 시내의 모습은 나에게 익숙한 풍경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항 앞 버스정류장은 서울이나 인천 외곽의 도로 같았고 시내에 들어서자 펼쳐진 해변과 야자수, 높이가 낮은 건물들은 제주도를 떠올리게 했다. 길거리는 정말 깨끗해서 어떻게 청소하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메이와 나는 어느 거리에서 ‘여기 신발 벗고 다녀도 될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텔 아비브 해변 1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사람들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스라엘은 국민총생산이 매우 높고 다양한 출신지 사람들이 모여 전통과 현대의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를 추구한다. 바다에서 서핑을 하거나 모래사장에서 비치발리볼이나 족구를 하는 모습이 흔했고, 해변에 헬스기구들이 모여있던 공간에는 밤시간까지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텔 아비브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야파 시장, 어느 카페 앞 골목에서는 사람들이 대낮에 삼바 비슷한 음악을 늘어놓고 춤을 추고 있었다. 공연단이 아니라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합류했다 흩어졌다 하면서 춤판이 이어지는 식이었다. 그 느긋한 모습과 길에서 흔히 들려오는 영어, 1월 초인데도 해가 쨍쨍하고 비교적 온화한 날씨였던 점 등은 미국 드라마에서 자주 봤던캘리포니아느낌이었다.
야파 시장에서 산 엽서
야파 시장의 한 빵가게 앞
텔 아비브 해변 2
텔 아비브는 이스라엘 최대 도시로 실질적 수도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헌법상 수도는 예루살렘이다. 문제는 팔레스타인 역시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육지책으로 예루살렘은 현재 이스라엘령인 서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령인 동예루살렘으로 쪼개어졌다. 유엔안보리에서는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한 1980년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에 관한 법>을 같은 해에 국제법 위반으로 보았다. (이 판결에 따라 대다수의 국가는 주 이스라엘 대사관을 서예루살렘에서 텔 아비브로 옮겨야 했으며, 한편 2018년 트럼프 미 행정부는 친이스라엘노선의 일환으로 주 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을 도로 서예루살렘으로 옮긴 바 있다.)
동예루살렘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및 이슬람교의 성지로 알려진 구시가지가 포함된 지역으로, 메이와 나는 당일치기 투어를 통해 텔 아비브에서 팔레스타인령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세계에서 몇 안 되는 5천 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 예루살렘을 직접 보는 일 자체가 의미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대형버스를 타고 도착한 예루살렘 땅은 건축물의 색감, 골목의 구조 등 도시의 호흡 자체가 남달랐다. 마치 시간여행을 온 것 같았다.
왼쪽: 통곡의 벽, 오른쪽: 성녀 베로니카가 예수의 얼굴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고 전해지는 십자가의 길 6처소
그리스도교에서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맞이하고 부활했던 곳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유대교에서 예루살렘은 고대 이스라엘왕국의 수도였고 기원전 10세기에 최초의 성전(사원)이 지어진 가장 중요한 성지다. 그러나 이 성전은 1세기 경 일명 ’통곡의 벽‘이 된 축대 일부만을 남겨두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전산’이라고 불리는 이 일대에는 이후 로마 제국의 점령으로 성당이 지어지기도 했으나 현재는 이슬람 정복 당시 지어진 모스크 두 개가 건재하고 있다. 하나는 무함마드가 승천한 장소로 전해지는 '바위의 돔'이고, 다른 하나는 그 승천을 기리기 위해 지워진 사원 '알 아크사 모스크'이다. 이슬람에서는 예루살렘을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성지로 삼는다.
성전산 일대 풍경. 황금색 돔이 무함마드가 승천한 장소 ‘바위의 돔’이다.
유대교와 이슬람의 분쟁의 뿌리가 너무나 깊은 나머지 성전산은 테러 방지를 이유로 아예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모두 아브라함 계에서 뻗어 나온, 같은 신을 모시는 형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유대교는 메시아(구원자, 예언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믿고,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한편, 이슬람교는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로 인정하지만 절대적이자 결정적인 예언자는 6세기에 태어난 무함마드 뿐이라고 본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 형제나 다름없는 존재들이 세계에서 가장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집단이라니, 비극이자 아이러니다.
한편 예루살렘이 동서 분단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이 1945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여전히 화해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결정적인 분쟁의 씨앗은 제삼자인 영국이 사실상 제공했다. 영국은 1차 대전 당시 후세인을 필두로 한 무슬림 세력에 딜을 제안한다. 후세인이 오스만 제국을 내부에서 붕괴시키면 영국은 중동의 아랍 지역에 새로운 무슬림 국가를 세울 수 있게 해주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일명 맥마혼-후세인 협정이다. 그러나 이후 영국은 약속을 뒤엎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나라인 이스라엘국 수립을 인정하였다. 전범국인 독일은 물론,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묵인했거나 혹은 그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국가들은 2차 대전의 절대적인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의 국가 수립을 크게 반발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은 일제히 이스라엘에 전쟁을 선포했다.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면 아랍의 자주권을 보장해 주겠다던 영국의 약속이 거짓말로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인은 졸지에 나라를 잃고 이스라엘에서 일종의 2등급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들의 거주지역은 별도 국가의 영토가 아닌 ‘서안지구’, ‘가자지구’ 등으로 불려 오다가 유엔은 2013년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옵서버 국가’, 즉 유엔 회원국은 아니지만 국가의 지위를 가지는 존재로 인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팔레스타인을 하나의 국가가 아닌 ‘자치정부’로만 인정하겠다는 국가가 존재한다(미국 등).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지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땅이 아닐까. 지구의 땅덩어리는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유한한 땅덩어리에 언제나 배타적인 경계가 존재하는 것이 정말 모두에게 이득인가. 잘 모르겠다.
동예루살렘 스케치. 텔 아비브보다 안타깝게도 훨씬 낙후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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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텔 아비브 시내, 어느 식당 야외 테이블에서 음식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데 어떤 남녀가 다가와 우리에게 혹시 관광객인지 물었다. 자기네는 이스라엘 유튜버 팀인데, 텔 아비브의 인상이 어떤지 얘기 좀 해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메이는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이스라엘은 분쟁 지역이고 위험하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사람들도 친절하고 거리도 평화롭고 마음에 들어. 한국이랑 비슷한 것 같아. 한국도 외국인들 입장에선 북한과 휴전 중이라는 이유로 위험한 국가에 속한다고 하는데 막상 가보면 치안이 좋은 곳이거든.”
이 정도가 정말 내가 텔 아비브에 대해 느낀 점이었다.
그런데 딱 그날, 이란의 고위 군사 간부인 가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이라크에서 암살되었다는 국제뉴스가 보도되었다. 당시 트럼프 미 정부가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솔레이마니를 표적으로 한 미사일 공습을 감행한 것이었다. 미 대사관은 이라크 내 미국인에게 즉시 미국으로 돌아가라는 소개령을 내렸다. 이라크 내 친이란 세력이 미국을 상대로 항전을 벌일 시, 이라크에 머무르고 있는 미국인의 안전이 위협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습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바로 나흘 전 이란이 지원하는 민병대가 이라크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관을 공격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직전에는 미국이 친이란 민병대 기지를 공습했고, 그 이전엔 이라크 주둔 미군이 헤즈볼라의 공격을 받아 미군 한 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헤즈볼라를 조직하고 지원하는 대표 인물이었으니, 이날의 공습은 보복의 보복에 대한 보복이었다.
중동에 군사적 긴장감이 돈다는 기사도 쏟아졌다. 한국 포털에서 읽은 기사 내용이 심각해 보여서 혹시나 하고 독일 매체도 확인해 봤는데, 독일에서도 역시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고 있어서 나는 정말 큰 전쟁이 날 것만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스라엘은 솔레이마니 암살 사건에 직접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중동의 이슬람 세력과 미국이 갈등과 분쟁을 빚으면 미국의 동맹국이자, 중동의 아랍 국가들 틈바구니에서 유일한 친서방국가로 존재하는 이스라엘에 불똥이 튄다. 미국을 향한 보복의 의미로 중동의 반미세력이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 반대로 중동의 이슬람 세력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고조되면 미국이 발 벗고 이스라엘을 지원하듯이 말이다.
그러지 않아도 실제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는 기존에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현재진행형이다. 내가 여행자로서 낭창하게 ‘둘러보고’ 있는 이곳이 뉴스 내용으로만 접하던 국제분쟁의 무대라는 사실이 순식간에 와닿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 같은 사람은 남들 피 흘리는 곳에 놀러 온 불청객일지도 몰랐다. 더욱이 나는 조금 전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텔 아비브 안전하고 쾌적해서 좋다’고 인터뷰를 자신 있게 해댔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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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런 일도 있었다. 메이와 나는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안녕, 그나저나 어떻게 지내?”
뭐 이런 식이었는데 뜬금없지만 우리가 이방인인 걸 알아보고 말을 걸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여행 중이라고 했더니 그가 하는 말,
“그렇구나, 근데 너희 둘이 왜 영어로 대화해?”
이 질문, 너무 기억에 남는다. 동양인 두 명이 영어로 대화하니 영어 스터디 클럽쯤 될 거라는 게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이유일까. 우리는 설명했다.
“나는 한국인, 친구는 대만인이고 우리는 베를린에서 알게 된 사이야. 한국인은 한국어, 대만인은 중국어를 쓰는데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하지 못해서 영어로 소통하는 거지. 한국어와 중국어는 완전 다르거든.”
우리 둘 중 한 명이 다른 인종이었다면 이런 질문이 나오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인종이 동양인의 특징을 뭉뚱그려 인식하면 동양인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 보이는 것과 같이 그의 눈에 우리는 자매처럼 닮아 보였을 수도. 그래서 ‘저렇게 비슷하게 생겼는데 서로 다른 나라 출신일 리가 없어.’, 동시에 ‘저런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영어권 국적일 리도 없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한국이 어딘지, 대만이 어딘지도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 대만, 한국어나 중국어 같은 개념을 잘 들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우리의 설명이 불충분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긴 대화를 이어가진 않고 금방 헤어졌다.
돌이켜보면 나도 다른 문화에 대한 무지로 누군가에게 실례를 저지른 일이 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 체코 프라하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가 숙소에서 두 소녀를 알게 되었다. 둘은 이스라엘에서 온 대학생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의 성인남녀는 군복무를 해야 한다고 들은 적이 있어서 그들에게 '너희도 군대 다녀왔어?'라고 물었는데 둘은 무슬림이라서 군복무 의무가 없다고 했다. 당시의 나는 그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지만 내 단순한 머릿속에는 ‘이스라엘에는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는 무슬림이 산다’ 정도의, 반쪽짜리 진실만이 전부였던 것 같다.
사실은 이스라엘도 비유대인이 살고, 대다수의 나라에서 누군가의 국적이 그의 종교를 결정하지 않는다. 이 소녀들은 집안이 무슬림일 뿐, 본인들은 종교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이들은 히잡도 착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군대의 주된 임무는 이슬람과의 분쟁으로부터 국민과 영토를 지키는 일이니 이스라엘 군대라는 화두는 이슬람권에 속하면서도 이스라엘 국민인 누군가에게는 껄끄러운 주제일 것이 분명하다. 제대로 모르면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아는 체하느라 오히려 실례를 저지른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영어는 백인만 쓰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에는 한 종교 집단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이나 외국 출신의 귀화 국민이 있고 다양한 종교 집단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출국심사도 아닌, 출국장으로 가는 길목의 사전 스캐닝부터 아주 까다롭고 오래 걸렸던 것이다. (벤구리온 공항은 보안이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한참을 줄에서 대기한 끝에 친구와 나는 분리되어(!) 간단한 검문을 받았다. 나는 큰 문제없이 통과되었다. 그런데 메이는 여권에 말레이시아, 이집트, 게다가 며칠 전 다녀온 튀르키예까지, 이슬람권 국가의 스탬프가 많다는 이유로 정말 불쾌할 정도로 많은 질문을 받았다. 여기는 왜 갔고, 저기는 왜 갔으며, 이집트는 누구랑 갔냐. 메이가 어머니와 갔다고 하니 어머니 성함이 뭐냐고까지 캐물었다고 한다. 얌전히 여행하고 돌아가는 사람을, 고작 여행기록을 보고 잠재적 테러범 취급을 하는 것 같아 보는 내가 다 진이 빠졌다.
베를린에 도착하며, 독일엔 적어도 전운이 없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또 내가 한국에서 누리던 편리함과 안전함은 내가 우연히도 이 시대의 한국에, 다수와 비슷한 피부색을 가지고 태어나 얻은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태어나보니 분쟁 지역이었다면? 태어나보니 전쟁 중이었다면? 태어나보니 내 민족이 핍박받는 시대였다면?
모든 곳의 평화는 과거에 누군가가 피를 흘렸기에 얻은 것이 아닐까. 혹은 현재의 평화는 미래의 유혈사태를 대가로 아슬아슬하게 누리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런 대가가 기다리고 있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같음과 다름, 옳음과 그름이 정말 이분법적으로 구분 가능한지 모두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