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기차를 타고 덴마크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나는 베를린에서, 초록이와 친구들은 다른 도시에서 따로 출발해 코펜하겐에서 넷이 만나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는데, 나는 그들보다 먼저 코펜하겐에 도착해 홀로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길 위에서 작지만 큰 사건이 일어났다. 폰으로 이메일 알림이 와서 확인해 보니 대학 합격 통지서가 날아온 것이었다. 자유대 철학과 컴퓨터공학(Informatik) 학사 공부를 허한다는 내용이었다. (독일에서는 입학 원서를 낼 때부터 부전공까지 정해서 지원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전공을 선택하게 된 것은 초록이 덕분이다.
당시 기준 몇 개월 전의 나는 미디어-컴퓨터공학(Medieninformatik)을 공부할 생각으로 독일 내 몇 군데 대학에 원서를 보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원서 마감을 며칠 앞둔 어느 여름날, 초록이네 집에 처음 놀러 가게 되었다. 초록이는 자기 책장을 보여주며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덴마크 철학자 쇠얀 키에르케고어(Søren Kierkegaard, 1813-1855)의 <반복>이라는 작품을 소개해주었다. 초록이는 문화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철학 이야기를 할 때, 특히 키에르케고어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우리는 그날 ‘반복’이라는 개념에 관해 정말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다. 초록이가 종이에 똑같은 원 두 개를 그리고는 “이게 반복이야?”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반복은 시간적 개념인데 이 그림은 반복이라기보다는 복제나 복사가 아닐까, 그런 말을 했다. 초록이는 시간적 개념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며 키에르케고어가 현실에서 ‘반복’이라는 행위가 가능한지를 실험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몇 번이나 여행을 반복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베를린에서 키에르케고어는 지난 여행 때와 같은 숙소에 머무르며 같은 카페에 가서 같은 커피를 주문하는 등, 같은 행위를 반복하지만 현실 속 타인들의 모습과 자신의 감상은 이전과 똑같지 않음을 발견한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키에르케고어의 질문 자체와 실험이 정말 재미있고 심오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의 대화가 내 마음을 움직여서 나는 철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디어-컴퓨터공학과 철학을 동시에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게 되었고 베를린 자유대에서 철학을 주전공으로, 컴퓨터공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정보를 찾았다. 그렇게 되면 미디어라는 갈래는 포기하게 되겠지만, 정말 포기해야 할지는 합격증을 받고 등록기간이 될 때까지 생각해 봐도 될 문제였다. 무엇보다 원서 마감이 아직 며칠 남았다는 사실에 이건 운명인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어서 철학+컴퓨터공학 학사 코스에 원서를 넣었다. 그리고 두 달쯤 후, 코펜하겐에서 합격 통지를 받은 것이다.
코펜하겐 여행은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초록이와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초록이네 친구 커플과 함께 한 여행이었고, 독일인 세 명과 함께 여행하면서 여러 가지 문화 차이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나와 달리 이 아이들은 맛집에 관한 정보 없이, 또 오늘 하루 뭐 먹을 건지에 관한 계획이 없이 여행을 하는 스타일이었고 나흘동안 여행지에서 사진이란 걸 찍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다녀본 여행지 중 가장 적은 사진을 남긴 도시가 코펜하겐인데, 초록이에게 ‘독일애들은 원래 여행할 때 사진 별로 안 찍니?’라고 물어보니 다 그런 건 아니고 독일인들도 케바케라고 했다. 다만 자기와 친구 다니엘은 ‘눈으로 머릿속에 사진 남기기를’ 더 좋아한다고. 또 작은 문화충격이었던 점은, 초록이의 친구 다니엘과 그의 여자친구(인 줄 알았던) 사라는 여행 계획을 확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진 상태라는 사실이었다. 서로 죽을 만큼 미워해서 헤어진 게 아니라 각자 갈 길이 달랐던 것뿐이니 여행은 원래 정해진 대로 하기로 했단다.
코펜하겐은 초록이가 정한 목적지였다. 키에르케고어가 살고 죽은 곳이기 코펜하겐이기 때문이다. 네 번 베를린으로 긴 여행을 떠난 것을 제외하면 그의 이력에서 가장 큰 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레기나 올센과의 약혼과 느닷없는 파혼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약혼을 파기해 당시 코펜하겐 세간에 적지 않은 풍문을 일으킨 키에르케고어는 이후 4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다. 그의 삶에서 보다 중요한 물음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를 회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당대의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이성과 논리에 기반한 당대 유럽 철학의 사조를 거부하며 괴로울 정도로 질문하고 회의하는 철학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덕이며 이성과 같은 개념과 가르침들이 개별 인간으로서 나에게 무조건 유의미할 수는 없다는 것이 키에르케고어의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절대적 힘을 가진 신이 있다고 머리로 믿는 사람도 가슴으로 느끼는 삶에 관한 불안함이나 절망감을 어찌할 수 없다. 키에르케고어에게 있어 종교란 개별 인간을 괴롭히는 불안 등의 현실적인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에 따르면, 어떤 불변의 진리나 지식도 현실의 내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어떤 울림을 주는 게 아니라면 소용이 없다. 이렇게 키에르케고어는 사유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감정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조명하고자 했고, 보편적 진리를 찬양하기보다는 지식과 지혜가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반문함으로써 철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어는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코펜하겐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항구도시였다. 베를린에서 흔한 앰뷸런스, 경찰차, 노숙자, 걸인과 같은 것들은 보기 힘들었고 어딜 가나 쾌적하고 깨끗했다. 한편 키에르케고어의 묘지는 시내 중심지와 가까운 공동묘지에 위치해 있었다. 유럽에서는 흔히 시내 한복판에 공원처럼 조성된 공동묘지를 보게 되는데 삶과 죽음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한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버지 옆에 묻힌 키에르케고어의 묘지 앞에서 우리는 말없이 그를 추모했다.
코펜하겐 여행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코펜하겐 시내 자전거 여행이었다. 코펜하겐은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잘 깔려 있고 도시도 그리 크지 않아서 자전거를 타면 도시의 다양한 면모를 구석구석 볼 수 있다. 하루를 넷이서 함께 보내기로 한 우리는 시내 자전거 대여점에서 자전거 네 대를 빌려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낯선 도시를 가로지르는 기분이란, 처음에는 아름답고 상쾌했다. 그러나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여기 볼 게 있나 싶으면 멈춰서 구경하고, 다 봤다 싶으면 또 달리는 식이었는데, 어느 시장도 구경하다가, 어느 광장에선 데모도 보다가 또 금세 어딘가로 떠났다. 한 마디로 정해진 목적지가 없었다.
그렇게 자전거로 여기저기 유랑하던 중, 희한하게도 길이 점점 야생에 가까워진다 싶은 지점이 있었다. 도로 옆으로 난 풀밭의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니 키가 2미터 정도 될까 싶은 작은 집들이 마치 세트장처럼 쫙 펼쳐졌다. 이곳이 설마 말로만 듣던 크리스티아니아?
크리스티아니아는 키에르케고어 묘지에 이어 코펜하겐에서 우리가 꼭 가고 싶어 했던 곳인데, 지도를 안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그곳에 가까워진지도 몰랐던 것이다. 크리스티아니아가 유명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0.07 km2 면적을 차지하는 이 지역은 원래 도시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군기지였다. 그러나 군사 기지가 쓰임을 다하고 버려진 공간으로 남게 되자 1971년부터 히피족들이 이곳의 빈 건물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버려진 건물을 고쳐 생활공간을 만들고 새로 집도 짓기 시작하며 크리스티아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코펜하겐의 주거비용이 가파르게 치솟는 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지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다.
크리스티아니아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규칙을 세우고 폐허를 주거지로 가꾸며 폭력과 가난이 없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집주인도 없고 세입자도 없는 형태로 거주하고 있다. 즉, 주거 비용이 0이고, 동시에 집이 부동산으로서 가지는 가치 역시 0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보니 대부분의 땅과 집은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고 주거에 돈이 든다는 법칙은 잘 생각해 보면 정말 불공평하다. 크리스티아니아의 주거형태는 자본주의의 기초 문법을 과감하게 거부하고 대안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무단 점거자일뿐이다. 크리스티아니아와 덴마크 당국 간에는 크고 작은 마찰이 끊임없이 있었다. 덴마크 정부가 여러 차례 크리스티아니아를 해체시키고 부지를 개발하려 했으나 2011년에는 크리스티아니아 주민들이 정부로부터 주거지 전체를 2천만 유로에 사들이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 현재 크리스티아니아에는 덴마크 통화인 크로네뿐만 아니라 그들만의 고유 통화인 론이 함께 통용되고 있고 주민들이 함께 공동체 회의와 토론을 통해 주요 의사결정을 내리는 등 정치적, 경제적인 독립성을 인정받고 있다. 공식적으로도 크리스티아니아는 자치도시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수립 이래 크리스티아니아 내에서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운행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자전거로 무거운 짐을 옮기거나 아이들과 자전거로 이동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카고 자전거가 이곳 크리스티아니아에서 발명되었다.
내가 이런 형태의 카고 자전거를 처음 보게 된 건 베를린에서였다. 대중교통이 비교적 잘 갖춰진 베를린 같은 대도시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독일의 대중교통은 한국보다 비싸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탄소배출을 줄일 수 있다는 이유로 대중교통보다 자전거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고 (우리나라는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자가용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는 단계에 있다면 말이다) 또 시간 내서 헬스장에 다니느니 출퇴근하면서 운동까지 하게 된다는 장점 때문에 많은 이들이 자전거를 애용한다. 이런 사고방식이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 때도 그러했으니 어렸을 때부터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자란 아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만큼 자전거 도로가 잘 마련되어 있는 것도 한국의 대도시들과 비교되는 점이다.
베를린처럼 코펜하겐에서도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봤다. 시내 한복판에 자전거 행렬이 끊이지 않는 모습에 모두가 익숙한 듯했다. 크리스티아니아에서 발명된 카고 자전거는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아이템이 아닐까 싶다. 자전거나 보행자를 별로 배려하지 않는 한국의 운전자들을 생각하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운송 수단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어렸을 때 자전거로 많은 곳을 다녔다고 하던데, 대중교통과 자가용이 상용화되자마자 자전거는 구시대의 것, 혹은 돈 주고 하는 취미로서 소비되는 정도로 전락했다. 현대의 한국과 같은 여건에 있는 부모라면 아이와 함께할 이동수단으로 카고 자전거는 고려 대상이 전혀 아닐 것 같다. 돈 모아서 차를 사든지, 아니면 차라리 몇 푼 주고 우아하게 택시를 타지 않을까.
자동차가 안 보이는 동네는 그 자체만으로 어딘가 특별했다. 어딜 가나 공기처럼 존재하는 자동차가 없으면 이런 분위기구나, 하는 느낌. 비포장도로와 오두막집, 수풀을 지나 어느 호숫가에 앉아 우리 넷은 맥주를 마셨다. 돈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 준,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품은 인디 도시 크리스티아니아의 어느 풍경.
우리 숙소는 침실 두 개와 거실, 주방, 욕실이 있는 아파트였다. 침실은 두 개 다 정말 작아서 침대와 작은 서랍장 하나로 꽉 찬 구조였고, 거실은 침실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더 넓었다. 자기 전 스트레칭을 즐겨하는 습관이 있었던 나는, 어느 밤 침실 바닥에 자리를 잡고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침대 옆에는 공간이 정말 눈곱만큼 남아있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불편한 모습이었다. 초록이가 그걸 보더니 왜 넓디넓은 거실을 놔두고 여기서 이러고 있냐는 것이었다.
“다니엘이랑 사라가 주방에서 뭐 하고 있더라고. 그 옆에 거실에서 이러고 있으면 부끄럽잖아.”
했더니 초록이는
“그게 왜 부끄러워? 쟤네 너한테 관심도 없을 걸.”
하는 것이었다. 나는 왜 내가 주목을 받고 관심을 얻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이렇게 부끄러움의 기준이 다른 것도 독일인과 한국인의 차이일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아 허허 웃으면서도 나는 끝내 거실로 나가지 않았다.
*
코펜하겐 여행의 마지막 날, 넷이 모인 브런치 자리에서 사라와 이야기를 나누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았다.
“삶에서 꼭 이루고 싶은 게 있어?”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응, 나는 사실 작가가 되고 싶어.”
라고 고백하듯이 답했다. 너는? 되물으니 사라의 대답은 더욱 뜻밖이었다.
“나한테 가장 중요한 테마는 ‘사랑’이야. 나는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싶어.”
나는 아주 놀랐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이라는 말은 너무 로맨틱하고도 추상적이어서 주변에서 들어본 일도, 내가 뱉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20대 초반인 사라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귀엽기도 했고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사랑이란 어쩌면 정말 중요하지만 크게 쓸모는 없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20대 초반은 공부, 아르바이트, 취업, 돈과 같은 문제들로 가득 찼다. 삶에 사랑이나 우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랑이 내 삶에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가 같은 것을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현재 20대 초반인 한국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 괜찮은 사람,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살기 위해 애쓰다 보면 말랑말랑하고 낭만적인 생각 따위 사치가 된다. 또 나는 사라가 연애와 결혼을 가능하게 하는 좁은 의미의 사랑만을 의미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삶에는 성과나 경쟁, 돈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아는 것은 그 사람을 정말 아름답게 만드는 어떤 힘이라고 생각한다.
사라가 한 말에 관해 나중에 초록이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사라의 말이 아주 인상 깊었다고 했는데 초록이는 시큰둥하게
“사랑이라니, 정말 순진한 생각이 아닐 수 없어. 나이가 어려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라고 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이가 어려도 낭만적인 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우리나라 동생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근데 너 작가가 되고 싶어?”
초록이는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되물었다. 나는 그렇긴 한데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부끄러워 우물쭈물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 관계의 정말 초반에 있었던 코펜하겐 여행은 마음속에 많은 발자국을 남겼다. 그냥 친구는 아니지만 연인도 아니었던 그때의 초록이가 지금은 남자친구가 되었고, 내가 글 쓰는 일을 누구보다도 응원해 주는 누군가가 되었다.
2년 반 후, 나는 베를린 자유대에서 키에르케고어에 관한 수업을 듣게 된다. 키에르케고어는 체계화된 철학서를 집필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일기, 에세이나 편지 형식의 작품을 남겼고 번번이 필명을 바꿔가며 출간했기 때문에 그의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여느 철학자에 관한 수업과 사뭇 달랐다. 이번 학기는 키에르케고어의 수수께끼 같은 문장들과 씨름하고 그에 감명받기도 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키에르케고어가 정말 멋진 철학자라는 것을 직접 느끼게 된 지금, 코펜하겐의 추억이 더 소중해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초록이가 나에게 끼치고 있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가 또 와닿고 말이다. 이렇게 코펜하겐 여행의 감상은 2년 반도 더 지나서야 완성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