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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Oct 19. 2023

보헤미아의 호수 위로 별빛이 쏟아지고

체코 우정 여행

(*보헤미아 왕국은 체코의 옛 이름이다)

챠챠는 중국에서 건축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베를린에서 예술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친구다. 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리지만 나이차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하고 통찰력 있는 친구, 가끔 대화의 한 꼭지가 물러나며 정적이 흘러도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다. (참고로 챠챠는 한국어를 할 줄 알지만) 우리는 독일어로 소통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존댓말이나 호칭 정리가 필요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언니'였던 적이 없고 그는 나에게 '친한 동생'이 아니라 늘 '친구'였다. 한국에서는 같은 출생연도끼리만 친구, 나머지는 언니-동생이나 형-동생 관계를 이루니 나이차이가 나는 사람을 격의 없이 알고 지낼 기회가 적었다. 그래서 챠챠와의 우정은 더욱 특별하다.


10월 중순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챠챠와 체코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프라하에서 2박, 남부의 작은 마을 텔치(Telč)에서 1박을 하고 다시 프라하를 거쳐 버스로 베를린에 도착하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첫날 아침부터 문제가 생겼다. 베를린에는 사건사고나 공사 등 다양한 이유로 자주 대중교통이 지연되거나 노선이 바뀐다. 그런데 하필 출발일 아침에 챠챠가 타야 할 트램 운행이 엄청나게 지연되어 버스터미널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버택시를 찾아봐도 트램보다 더 오래 걸리는 것으로 나오고, 택시비는 베를린에서 프라하로 가는 플릭스버스 티켓보다 더 비싸게 뜨고 있어 챠챠는 꼼짝없이 버스를 놓쳐야 할 상황이 되었다. 나는 조금 일찍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는데, 비슷한 시간대의 다른 버스 도착이 지연된다는 안내를 보게 되었다. 제발 우리 버스도 지연돼라, 빌고 있는데 말도 안 되게 우리 버스 정보가 갑자기 전광판에서 아예 사라져 버렸다. 나는 버스도 챠챠도 없이 혼자 버스터미널에서 발을 동동 구르게 되었다. 그러나 운 좋게도 도로상황이 베를린 시내 전체에 총체적 난국 수준으로 나빴던 모양, 우리가 타야 할 프라하행 버스 역시 50분이나 지연되어 10분 지각한 챠챠는 40분 일찍 도착한 셈이 되었다.


그렇게 예정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프라하 구시가지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상점에서 파는 기념품들은 식상하고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온갖 언어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인기 관광지 한복판을 누비는 것이, 베를린에서 살기 이전의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4년 동안 살면서 내 취향과 관점이 많이 변한 모양이었다. 구시가지에서 까를교까지의 짧은 여정에서 나는 관광객이 너무 북적댄다는 감상 이외에는 어떤 정취를 찾기가 들었다. 베를린에서 사람들이 흔히 ‘어디 어디 동네는 너무 관광지 같아(touristisch)’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봤는데 생각해 보면 언젠가부터 나도 이 표현을 부정적 의미로 쓰기 시작했다. 게다가 프라하는 이미 세 번이나 다녀와봤으니 구시가지와 프라하성 같은 곳에서 크게 감탄할 것이 더 없기도 했다. 내가 유럽 대도시인 베를린에 살면서부터 북적이는 관광객들을 피해 다니고 싶어 하게 된 것은 서울 사람들이 명동에서 약속을 잡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예술에 관심이 많은 챠챠와 함께한 만큼 무하 박물관과 국립 미술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는 아르누보 화풍을 이끌어 전 세계에 영향력을 끼친 체코 출신의 화가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무하 박물관의 전시는 큰 규모는 아니지만 무하의 주요 작품들과 잘 알려지지 않은 스케치들, 심지어 유화까지 접할 수 있다. 무하의 일러스트는 대부분 포스터와 각종 제품 포장지로 다량 생산될 수 있도록 제작된 판화인만큼 인터넷이나 굿즈에서 보던 것과 전시실에 서 만난 작품들 간에 감동의 차이가 크지 않았던 점은 조금 아쉽다. 유화나 수채화는 사진본으로는 느낄 수 없는 색감, 질감과 아우라를 원본에서 실감하는 재미로 전시회 구경을 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이다.

몽환적이고 매혹적인 무하의 일러스트화들


한편 프라하 국립 미술관은 시내 여러 곳에 건물을 두고 있는데 우리가 간 곳은 복닥복닥한 관광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Trade Fair Palace 건물이었다. 이곳의 상설 전시가 말 그대로 예술이었다. 미술관이 정말 커서 모든 층의 전시를 다 보려면 꼬박 하루가 걸릴 것 같으니 우리는 몇몇 코너를 뛰어넘고 흥미로워 보이는 부분만 감상했다.

Edvard Munch <The Dance on the Shore(1900-02)> / Gustav Klimt <The Maiden(1913)>
Franz von Stuck <Faun and Nymph (Teasing) (c.1892)>
Josef Šíma <Memory of the Landscape I Have Never Seen(1936)>
Ludek Marold <The Egg Market in Prague(1888)>
Jand Zrzavy <Christ and John(1928)>, Otto Gutfreund <Anxiety(1911-12)>



둘째 날 저녁에는 재즈 클럽에서 작은 콘서트를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 숙소는 두 명이서 한 방을 쓰고 화장실과 샤워실은 옆 방 사람들과 공용으로 쓰는 에어비앤비 아파트였고, 침실이 총 10개, 공용으로 사용하는 화장실 세 개, 샤워실 두 개와 주방이 있었다. 구시가지 광장 가까이에 위치해있는데다 도미토리룸이 아닌 2인 1실을 쓸 수 있는 형태 치고는 정말 저렴한 가격이었다. 그러나 첫날밤부터 좀 문제가 있었다. 샤워기에서 온수가 안 나온 것이었다. 외국에 거주 중이라는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내봤지만 건물 내 다른 상가에서 문제가 생겨 이곳까지 피해가 온 거고 언제 고쳐질지 잘 모르겠다는 황당한 대답을 받았다. 그런데 둘째 날이자 마지막 밤은 일이 더 커졌다. 재즈 클럽에서 돌아와 숙소에 도착해 손을 씻으려고 화장실에 갔는데 수돗물이 한 두 방울 나오다 마는 것이었다. 게다가 불길하게도 세면대 위에 큰 생수병이 놓여있어 ‘물이 안 나오니 생수로 손을 씻으라는 건가’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전날 온수가 안 나왔던 건 문제의 서막일 뿐이었고 결국은 단수가 된 모양이었다. 나는 주방 겸 거실로 나와 마침 거기 혼자 앉아있는 다른 투숙객에게 물었다.


“세면대에서 물이 안 나오는 것 같던데, 알고 있었어?”

“응. 나도 그것 때문에 호스트한테 연락했는데 숙박비 50프로를 돌려주겠다고 하더라. 고칠 수도 없는 상황인가 봐.“

“변기랑 샤워기도 물 안 나오고? “

“응. 나도 참 황당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사람 말로는 다른 사람들도 호스트에게 컴플레인을 보내고서야 부분 환불 제안을 받았다고 하고, 그전에는 물이 안 나올 거라거나, 어떤 대책을 세우겠다는 어떤 연락도 못 받았다고 한다. 나는 우선 화장실로 돌아가 변기, 세면대에서 모두 물이 안 나오고 샤워실 역시 단수된 걸 확인하고 동영상을 찍었다. 부엌 개수대도 마찬가지였다. 침실로 돌아와 챠챠에게 말했다.


“우리 짐 싸서 다른 숙소로 옮겨야 할 것 같아. 여기 이제 물이 아예 안 나오고, 변기물도 작동이 안 돼. 짐부터 싸고 있을래? 나는 인터넷으로 호스텔 알아볼게.“


챠챠는 아연실색이 되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혼성 4인 1실 도미토리룸이 저렴한 가격에 있어 어렵지 않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호스트에게는 상황을 알리고 우리 체크아웃할 거니 환불받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내놨다. 여전히 호스트는 사과의 기색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 태도였다. ‘나도 7년 동안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건물 내 다른 상점의 문제라 할 수 있는 게 없다, 너희가 다른 데로 옮겨가준다면 차라리 다행이다.’라는 식이었다.


에어비앤비에서 호스텔로 신분 급강등당한 우리는 밤 11시에 작은 이사를 해야 했다. 나는 정말 기분이 나빴는데, 건물 전체가 단수되는 초유의 사태가 어떤 예고도 없이 발생했다는 후진성에 놀랐고 내가 예전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도시인 프라하에서 일어난 일이라 더욱 속상했다. 단수라는 사고 자체는 호스트든 우리든 그저 운이 나빠 겪은 것이다. 그러나 호스트는 일단 이 도시에 살지를 않으니 문제가 생기면 달려와서 최소한 ‘언제까지 단수’라는 식으로 화장실에 안내문이라도 붙일 수 있는 상황이 안 되었다. 청소하는 스태프를 통해서라도 어떤 대책을 먼저 제시하거나 소통할 생각도 없었다. 누군가를 통해 생수 여러 병을 사놓은 게 그가 취한 유일한 액션이었다. 생각해보면 10개의 객실, 즉 최대 20명의 사람들이 변기 세 개와 샤워실 두 개를 공유하는 터무니없는 형태의 숙박이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 많은 사람이 밤새 씻지도 못하고 단수된 상태의 변기 세 개를 함께 사용해야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뜻밖의 사태에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는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약삭함이 일단 문제지만, 이 정도 규모의 숙박시설에 리셉션이나 상주 직원도 없이 일종의 무인 호스텔이 에어비앤비 형태로 운영될 수 있도록 허용 또는 방치한 프라하 시의 행정적 문제도 크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시내 중심지에 값싼 숙박시설을 찾는 사람들의 수요가 높으니 ‘저렴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수준 이하의 서비스를 저렴하게 제공하는 것’은 아주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가난해서 값싼 불량식품을 먹고 배탈 난 사람이 있다면 그의 가난이 죄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불량식품을 허용한 사회를 탓할 권리가 있다. 나는 가난한 여행자로서 (생각해 보니 이전 프라하 여행 때는 지금만큼 가난한 학생 처지가 아니었다) 저질의 서비스를 가능하게 한 도시 구석구석의 행정 수준과 양심에 실망하고 또 슬퍼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답 안 나오는 도시 비평을 하고 있으니 챠챠가 쿨하게 그랬다. 비용을 아끼고 싶은 여행자는 중심지에서 조금 벗어난 동네에 숙박하면 될 일이란다.


급하게 구한 호스텔의 4인실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혼자인 다른 투숙객이 있길래 여기 온수 잘 나오냐고 물어봤더니, 잘 나온단다. 나는 에어비앤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간단히 해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이라는 그에게 ‘나는 아르헨티나 도시는 부에노스아이레스밖에 몰라.’했더니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어떻게 알아?’하며 아주 화색이었다. 내가 탱고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니 그는 더욱 신이 나서 자기가 기타로 연주한 탱고곡을 유튜브에서 찾아내어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영국, 체코, 독일로 여행 중이라고 했는데, 심지어 며칠 후 베를린에 머무를 예정이라고 했다.


“와, 나 베를린에 살아.“

“그럼 베를린 구경시켜 줄래?“

“안 될 것 없지.“


그러나 우리 모두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제일 먼저 일어나 묵묵히 자기 짐을 싸서 사라졌다. 친구가 된마냥 즐거운 대화를 나눴지만 사실은 갈 길이 다른 제각각의 여행자일 뿐인 우리의 30분짜리 인연이 재미있었다.


셋째 날 오후, 우리는 기차를 타고 체코 남부의 작은 마을인 텔치로 이동했다. 창밖 풍경 속에선 집과 건물이 드물어져 갔고, 풀숲이 선로에 점점 가까워졌다. 남부로 내려갈수록 기차는 느려졌고, 어떤 지점부터는 기차역이 철도 바로 옆에 세워져 승강장이라는 개념이 없을 만큼 작은 도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내린 역인 텔치역 역시, 기차에서 내리면 바로 보도였다. 이곳 텔치는 여러 체코 여행 후기글에서 ‘동화 같은 도시’라는 평을 보고 언젠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선 광장 외에는 크게 볼 것이 없는 작은 마을이라고 들었기에 느긋하게 산책과 휴식 정도만 할 예정이었다.


이곳에선 보헤미아의 예스러운 얼굴과 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1박을 예약한 숙소는 광장 바로 옆 게스트하우스였다. 역에서 게스트하우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였으므로 우리는 당연히 걸어갈 계획이었는데, 텔치로 향하는 길 호스트에게 연락이 왔다. 원한다면 역으로 픽업하러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감사하게도 호스트의 차를 얻어 타고 텔치역에서 숙소까지 편안하게 이동했다. 프라하에서 이래저래 마음고생을 했던 터라 마을의 첫인상이 너무 좋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얻었다.

우리는 다락방 침실에 짐을 내려놓고 거의 바로 다시 밖으로 나와 동네를 구경했다. 정말 느린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산책하니 더 이상 볼만한 게 없었다. 줄지어 늘어선 ‘동화 같은’ 건물들(사진 왼쪽)은 하나하나 살펴보니 절반 이상이 문 닫은 상점이었고, 문 연 곳은 기념품 가게였다. 광장의 반대편(사진 오른쪽)에 있는 식당 세 개, 카페 세 개 정도가 유일하게 관광객들의 배를 채워주는 장소였다. 그들에게는 관광객들이 유일한 생계수단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느 골동품 가게에서 누군가가 낡은 분홍색 목마를 사는 모습을 구경한 것이 이 광장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이었다. 작은 미술 전시가 있어 구경해보려 했지만, 체코 코루나로 현금 결제만 가능하다고 해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다른 곳에서는 카드 또는 유로 현금 결제가 가능했다.) 조용한 호숫가엔 가을빛 물감이 풀리고, 쓸쓸한 벤치는 누군가의 온기를 기다렸다.

비가 쏟아져 다시 숙소로 걸음을 향했다. 중간에 만난 반가운 슈퍼마켓에서 물과 맥주, 간식거리를 사들고 빗속을 걸었다. 침실은 손바닥만 했지만, 여행 중 처음으로 개인 욕실이 딸린 방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안락함을 느꼈다. 지붕 위로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다락방에서 늦은 낮잠을 잤다.


피로가 풀릴만큼 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었다. 배는 안 고프지만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것 이외에는 할 게 없어 광장의 멕시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우리는 보헤미아 남부 도시에서 멕시코 음식을 먹고는 베를린이나 프라하보다도 저렴하다며 참 좋아했다. 이런 우리 모습은 투어리즘의 부조리의 극치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숙소로 돌아와 미드를 한 편 보고 잠을 청했다. 짧은 텔치 여행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새벽 5시 반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가 이 다락방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침대에 다시 누으려다 고개를 들어 다락 천장으로 난 창을 올려다봤는데 까맣고 네모난 밤하늘에 하얀 별이 수도 없이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젖힌 채 넋을 놓고 별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이곳은 시골이라 빛공해가 없으니 지금 밖에 나가서 별구경을 하면 대박일 거라는. 그러나 밖은 엄청 추울 것이고 침대 안은 포근할 것 같은데. 고민을 끝내게 한 것은 그때 떨어진 별똥별이었다. 텔치의 밤하늘에 별똥별이 그려지는 것을 보고 나는 단박에 ‘나가야겠다‘ 생각해 챠챠를 깨웠다.


“챠챠, 일어나 봐.”


챠챠는 평소의 차분한 성격에 어울리게 웅얼거리거나 잠에 취한 기색 없이 너무도 이성적으로 대답했다.


“응.”

“밖에 별 보러 가자. 지금 나가면 진짜 많이 보일 것 같아.”


그야말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일 수도 있을 텐데 챠챠는 즉시 일어났다. 우리는 대충 옷을 껴입고 밖으로 나가 밤하늘 아래서 탄성을 냈다. 하얀 별들이 깜깜한 밤하늘을 보면 볼수록 더 많이 모습을 드러냈다.


챠챠는 중국 칭다오 출신이다. 칭다오는 인구가 천만 명인 초대형 도시고 챠챠는 평생을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렇게 많은 별을 보는 게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시골의 주택에서 자라 어릴 때 마당에서 쉽게 밤하늘의 별을 구경할 수 있었다. 평상에 누워서 가만히 밤하늘을 지켜보면 별들이 서서히 한쪽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까지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도, 겨울의 새벽 5시가 밤늦은 시각보다 더 별을 잘 볼 수 있는 시간대라는 것도 우리 집에서 자라며 알게 되었고, 별똥별도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당에서 몇 번이나 보았다. 그러나 중국의 대도시에서 자란 소녀에게 깜깜한 밤하늘이란, 별이 주는 감동이란, 미지의 세계였다. 그러니 그는 별 구경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르고 일단 따라나선 것이었다. 새벽 5시 반, 어떻게 보면 미친 제안을 선뜻 받아준 챠챠가 고맙기도 하고, 그가 몰랐던 별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어서 나에게도 이 사건은 감동적이었다.


광장에는 가로등 몇 개가 별구경을 방해하고 있어 우리는 더 어두울 것 같은 호수 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선 자연이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칠흑같이 깜깜한 호수 물결이 별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저기 봐! 별빛이 호수 위로 반사되고 있어!”

“저기도!”


호수 수면에 비친 별을 세 개나 발견하고는 우리는 정말 행복해했다. 깜깜하던 하늘은 동트기 직전이 됐는지 갑자기 한 뼘씩 밝아오기 시작했다. 별똥별은 더 이상 만나지 못했지만 이 새벽 시간은 나에게도 챠챠에게도 정말 특별한 추억이 되었다. 챠챠에게는 쏟아질듯한 별을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면 나는 호수에 비친 별빛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어두운 호숫가에 이른 새벽에 갈 일이 없었다. 텅 빈 공원에서 밤하늘을 독점해 본 적도 없었다. 사하라 사막이나 몽골만큼 별빛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아닐지언정 텔치는 도심도 아니고 대자연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 될 것 같은 옛 읍성이 주는 매력이 있었다.

새벽 여섯 시 텔치의 호숫가, 동이 튼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하고 9시쯤 일어나 체크아웃 준비를 했다. 여행의 마지막날이기도 한 그날은 다행히 날씨가 아주 좋았다. 프라하로 돌아가는 기차는 오후 2시 반이었으니 시간이 넘쳤다. 카페에서 아침으로 커피와 케이크를 먹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지만 다음 이벤트인 점심 식사까지 시간은 한참 남아 있었고, 아직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광장의 한 벤치에 챠챠와 나란히 앉아 햇살을 쬐며 책을 읽었다. 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펼쳤다. 각자 책을 읽으며 나른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 친구가 나는 정말 좋다.


플릭스버스를 놓칠 뻔한 첫날의 쫄깃했던 순간도, 첫사랑의 역변한 얼굴과 같은 프라하의 극심한 투어리즘도(이건 도시가 변했다기보다는 내가 변한 거라고 해야 옳지만), 에어비앤비에서 짐을 싸서 나오던 때의 속상함도 모두 뒤로 했다. 텔치의 별빛과 햇살로 보헤미아를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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