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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 Jan 09. 2021

마약

면역

  처방받은 약이 떨어져갈 때 쯤 산부인과 외래 진료 예약일이 다가왔다. 또다시 몇 개의 검사를 하고나서 엄마와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나에게 지금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물었고 처방받은 약을 먹으니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혹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았고 없어질 것 같지 않다며 혹이 더 커져서 터지게 되면 위급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약을 먹고 통증이 사라졌는데도 수술을 해야 하다니... 너무 놀라 약을 먹으니 괜찮은데 왜 수술을 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그 약은 마약성 진통제란다.”


  마약은 나쁜 것이라는 사실을 학교에서 배워서 알고 있었지만 마약성 진통제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마약성분이라 하더라도 병원에서 의사가 처방해 주는 “약”이라면 괜찮은 것이 아닐까 싶어 수술 대신 배가 아플 때마다 약을 먹으면 안 되냐고 물었다. 의사는 아플 때마다 약을 먹을 생각이라면 평생 먹어야 하는데 그 약은 평생 먹을 수 있는 약이 아니며 병을 낫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진통만 느끼지 못하게 해주는 약이라고 했다. 할 말이 없었다. 약을 먹고 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진통이 없어진 게 아니라 강력한 마약성분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통증을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라니...

  혹의 크기나 위치, 병변 등 의사가 설명하는 것들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자궁, 나팔관, 난소, 양성, 종양 등은 초등학교 교과서 밖의 영역이었고 엄마와 의사의 대화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수술을 피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인 것 같았으나 수술을 하고 병실에 입원을 해야 한다는 충격이 너무 커서 잘 들리지 않았다. 

  병원을 갈 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또다시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차가운 수술대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어 정신을 잃어야하고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몰려오는 극심한 통증을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면서 공포와 우울, 절망 등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처음 경험한 수술은 모든 것이 빠르고 정신없이 지나가 두려움을 느낄 새도 없었는데 두 번째는 이전 경험으로 학습이 되어 그 고통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더 무서웠다. 

  감정은 바이러스와 달리 처음의 경험으로 면역이 생겨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겪을수록 증폭된다는 것을 나는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감정은 그 어떤 백신으로도 면역을 생성할 수도 없고 방어막 없이 고스란히 내가 감내해야 할 전쟁터였다.

  수술 전에 의사가 확인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고 했다.     


“너는 나를 믿니?”      


  모든 것이 응급으로 빠르게 진행했던 맹장 수술과는 많이 달랐다. 이 수술은 환자가 의사를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성인 환자와 달리 의사의 수술실력, 병원의 인지도, 수술 받은 환자의 후기 등 여러 요인들을 놓고 손익계산을 따져 물을 수 있는 판단력을 지니지 못할 정도로 어린 나이였고 오롯이 부모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소아과가 아닌 타과에서 어린 아이를 수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나처럼 초경도하기 이전에 부인과 관련 질병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례는 알고 있었으나 본인이 직접 이런 환자를 맡게 된 적은 처음이라 수술이 매우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른 병원에서 여러 의사의 소견을 들어볼 것을 은근슬쩍 권유하는 것 같았으나 마약성 진통제를 끊으면 통증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이 병원에서 흔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병원 의사들도 마찬가지 상황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냥 여기서 하겠다고 답했다. 

  의사는 수술 방식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수술흉터가 많이 남지 않지만 재발할 위험이 있는 방식과 수술흉터가 남지만 종양을 깨끗하게 제거할 수 있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보통 미혼 여성의 경우 흉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전자를 선호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 방식이 복강경을 쉽게 풀어 이야기해준 것 같다. 나는 이미 몸에 맹장수술 흉터가 있는 상태였던 터라 흉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는 아프지 않고 싶으니 흉터와 상관없이 재발하지 않는 방식으로 수술하기를 원한다고 답했다. 의사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흉터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흉해서 보통은 선호하지 않는다며 복강경을 권유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배에 있는 수술자국은 옷을 입으면 보이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 수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의사는 당황했지만 내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려 열심히 노력하면서 수영장에 갔을 때를 생각해보라고 했다. 비키니 수영복을 입으면 흉터가 다 보이기 때문에 입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저 비키니 안 입어요.”라고 답했다. 

  수술 방식과 날짜를 정하고 진료는 마무리 되었다. 마지막으로 의사가 궁금한 것이 있다고 했다. 최근에 극심한 스트레스 받은 일이나 다른 친구들이 경험하지 않는 특이한 경험을 하여 충격을 받았는지를 물었다.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라 아주 잠깐 고심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 답변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에게 잠깐 밖으로 나가있어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의사는 엄마에게 잠깐 진료실 밖에서 대기하라고 말했고 마지못해 엄마가 나갔다. 


  “엄마와 아빠 사이가 안 좋아서 자주 싸워요. 그거 이외에는 스트레스 받을 일이 전혀 없어요.”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 엄마는 또 의사와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를 물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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