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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 Jan 09. 2021

제왕절개

막내

  수술 날짜를 잡은 덕분에 학교에 질병 결석 일정을 미리 통보할 수 있었는데 그 당시 임신 중이었던 담임선생님의 갑작스러운 휴직으로 정년퇴직 후 집에 계시다가 임시로 잠깐 오신 나이가 지긋한 남자 선생님께 다시 나의 질병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해서 살짝 난감했다. 친구들에게도 산부인과 질병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배에 생긴 종양을 제거해야 해서 한동안 학교에 나올 수 없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작년 맹장수술 경험을 떠올려보니 그때 당시 담임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병원 위치와 병실을 알려주어 단체로 면회를 왔던 기억이 났다. 산부인과로 같은 반 친구들이 단체 면회를 오게 된다면 살짝 난감할 것 같아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년 맹장수술 면회 이야기를 했다. 병실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여럿이 같이 생활하는 다인 병실에서 면회 온 친구들이 시끄럽게 떠들어서 난감했었다며 올해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선생님과 반장에게 미리 이야기했다. 이건 거짓말이었다. 

  병실에 입원해서 옷을 갈아입고 수술시간을 기다리니 몹시 초조하고 긴장되었다. 병실 분위기도 내과와는 많이 달랐다. 산부인과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가 늦둥이 여동생을 낳을 때 가본 기억이 전부였다. 노산에 제왕절개로 출산하여 피주머니와 소변줄에 모래주머니 복대를 차고 굉장히 힘들어했던 엄마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었는데 그것도 상당히 암울한 기억이었으나 그렇게 동생이 태어남으로 인해 9년 동안의 짧은 막내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어 내 인생의 전환을 맞게 된 시점이기도 했다.  

  수술 후 사람들이 다급하게 나의 뺨과 몸을 때리며 정신이 드냐고 계속 묻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다 정신은 들었는데 소리가 먼저 들리고 눈이 떠지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사람이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면 시각보다 청각이 먼저 돌아온다. 어렴풋이 어린아이한테 마취약을 이렇게 많이 투여했냐는 말이 들렸다. 얼마 후 눈을 떴고 병실이었다. 사람들이 안도하며 말을 해보라고 했다. 괜찮다고 하자 그 많던 사람들은 서서히 사라졌다. 보통 수술실에서 나오면 스스로 마취에서 깨어나야 하는데 병실에 오고 난 이후에도 한참 동안 깨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무통주사를 맞았음에도 통증은 심각했다. 하루 종일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누워있는 자세도 바꿀 수가 없었다. 

  입원 기간 동안 학교 친구들은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았으며 지인들도 병실에 방문하지 않고 꽃바구니와 과일바구니 배달만 보냈다. 그때 당시 다녔던 교회 목사님과 신도들이 와서 기도를 해주고 갔던 것 같은데 내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아는 사람들의 말속에서 스트레스받을 일은 없었으나 문제는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들의 말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였다. 6인실을 사용했는데 산부인과 특성상 자연분만을 하는 산모는 병실에서도 바로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멀쩡했고 며칠 뒤 바로 퇴원을 했다.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이 사람이 제일 부러웠으나 잠시 스쳐 지나가듯이 바로 퇴원했으므로 멀쩡하게 잘 돌아다니고 건강하게 웃으며 뛰어가듯이 나간 것 이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문제는 제왕절개로 수술한 나와 이름이 같은 산모였다. 이 사람 역시 수술을 했기에 몸은 멀쩡히 움직일 수 없었으나 입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들에게 어떤 사유로 수술을 했는지를 캐물었는데 자연분만을 한 산모가 퇴원하자 이 사람 이외에는 산부인과임에도 산모가 없었다. 하루 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환자부터, 할머니, 어린아이인 내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6학년이 제일 선배였는데 산부인과 병실에서는 내가 막내였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하루 종일 벽만 보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환자는 내가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픈 사람인 것 같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산모의 관심사는 단연 말없는 환자와 어린 나였다. 하루 종일 여동생으로 보이는 보호자가 간호하고 있는 말없는 환자와는 달리 나는 보호자가 병실을 비울 때가 많아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 그때 당시 우리 엄마는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더 이상 휴학을 연장할 수 없어서 항상 바빴다. 어린아이가 행실이 어떠했기에 저 나이에 산부인과 수술을 받느냐는 등 혼잣말인 것처럼 말했으나 좁은 병실 안에서 나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척하면서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힘든 시간이 며칠 동안 계속 이어졌다. 

  아침에 체온을 재러 온 간호사가 나의 체온을 재더니 체온계가 고장 난 것 같다며 다른 것을 가져왔다. 다시 해봐도 42도였다. 간호사가 내 이마를 짚어보더니 괜찮냐고 물었는데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열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오르자 간호사는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새벽부터 열이 났을 텐데 왜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살짝 다그쳤는데 나는 언제나 나만 참으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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