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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 Jan 19. 2021

꼬리

편도염

  고열 상태가 지속되자 담당의사가 병실로 와서 나의 상태를 체크했다. 고열과 수술은 아무 관련이 없는듯했고 아스팔트가 녹을 듯한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감기도 아닌 것 같았다. 담당의사는 아무런 해답을 내놓지 못한 채 병실을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이 올랐고 해열제도 소용이 없었다. 

  한참 뒤 처음 보는 의사가 병실로 왔다. 내과의사라고 했다. 여기저기 진찰을 보더니 또 다른 의사를 호출했다. 이번에는 이비인후과 의사가 왔다. 편도선이 부어서 고열이 난다면서 평소 목감기를 자주 앓았냐고 물어봤다. 코감기는 자주 걸렸으나 목감기를 이렇게 심하게 앓은 것은 처음이었다. 주사를 처방해줘서 맞았는데 엉덩이에 주사가 들어갈수록 한쪽 다리가 마비가 오는 느낌이 들었다. 주사 맞기 전에 많이 아플 거라고 간호사가 이야기해주긴 했지만 마비가 온다는 말은 없었다. 간호사에게 다리 감각이 점점 없어진다고 했더니 주사를 링거에 넣어 서서히 투여되도록 바꾸어주었다. 살면서 주사를 수도 없이 맞아봤지만 이렇게 아픈 주사는 처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은 내려갔으나 그래도 정상체온보다는 높은 상태였고 기침이 추가되었다. 이비인후과 의사는 열은 많이 내렸고 가벼운 기침 정도는 이제 괜찮지 않느냐고 나에게 상태를 물었는데 눈물이 났다. 의사가 당황했다. 감기에 걸려도 이 정도 기침은 하는데 왜 우냐고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을 하길래 “배가 아파요.”라고 했다. 배가 아픈 것과 편도선이 부은 것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서 황당한 표정으로 웃기에 “기침을 할 때마다 수술한 데가 아파요.”라고 했더니 그제야 미안한 표정으로 기침이 멈추는 약도 같이 주겠다고 했다. 

  내가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던 이른 아침 시간에도 병실에 나의 보호자는 아무도 없었다. 병원에서 연락을 했는지 오후가 다 되어서야 엄마가 왔고 의사가 내 상태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편도염인데 편도선의 크기가 남들보다 커서 앞으로 살면서 고열에 시달리는 일이 많을 것이기에 편도선 제거 수술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이제 막 수술을 끝내고 회복 중인 사람에게 다른 수술을 또 받아야 한다고 하니 청천벽력 같았다. 그건 몸이 회복된 이후에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간호사는 엄마에게 병실에 어린 환자를 보호자도 없이 밤새 혼자 두면 응급 상황 발생 시 병원에서 대처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서 한마디 하는 것 같았다. 작년에 맹장수술할 때도 보호자 없이 병실에 혼자 있을 때가 많았던 터라 부모에게 보호자로서의 간호에 대해 크게 기대하는 바는 없었으나 그때와는 다르게 내가 혼자 거동을 할 수 없는 시간이 오래 지속되었다. 그때도 일주일 동안 머리를 감지 못해 보다 못한 같은 병실의 다른 보호자가 내 머리를 감겨줬었다. 후에 돌아가면서 내 머리를 감겨줬던 보호자 할머니들이 우리 엄마에게 아무리 친엄마가 아니어도 애한테 이러는 거 아니라며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친엄마였다.  

  보호자가 병실에 상주해야 한다고 간호사가 따끔하게 한마디 한 이후부터 아빠가 퇴근 후 술에 취해 병실에 오기 시작했다. 더 스트레스였다. 술에 취해 고성방가에 주정을 부렸고 말 그대로 잠만 자고 갔지 간호는 하지 않았다.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갔다가 출근하는 것보다 병원에서 자고 출근하는 것이 거리 상 더 가까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며 병실을 숙박업소처럼 자주 이용했다. 부모는 나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아침이 되면 아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출근을 했다. 출석도장 찍듯이 병실에 오는 부모로 인해 말 많은 산모의 공격은 더 심해졌다. 자식에게 무관심한 부모의 태도를 보면서 완전히 안심한 것 같았다. 

  이비인후과 의사는 그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와서 나의 체온과 상태를 살폈고 산부인과 수술 집도의보다 자주 병실에 왔다. 열이 나거나 아픈 곳이 있으면 간호사나 의사에게 그때그때 바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나를 타일렀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의사가 하도 자주 병실에 오니 조금 불편했다.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파 병원을 많이 다녀서 그런지 아픈 주사와 쓴 약을 주는 의사와 간호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는 의약분업이 되지 않아 일반 병원에서 약을 판매했고 주사를 맞은 뒤에 바로 가루약을 물이나 시럽에 타서 보호자와 간호사가 합동으로 어린아이를 못 움직이게 붙잡고 억지로 약을 먹이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의사에게 다음부터는 열이 나거나 아픈 곳이 있으면 바로 간호사에게 이야기할 테니 이제 그만 오셔도 된다고 말했다. 의사가 조금 떨떠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열이 내리고 기침이 잦아든 이후에도 의사는 자주 병실을 찾아왔다. 본인이 나를 낫게 했으니 뽀뽀를 해줘야 한다고 장난을 쳤는데 그건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왜 안 되느냐고 의아해하며 물었는데 “혹시라도 내가 감기를 옮기면 안 되잖아요.”라고 했다. 의사는 편도염은 감기와 다르게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는 것을 장황하게 설명했으나 나는 정말 많이 아팠었기에 혹시라도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이 병에 걸리게 된다면 많이 아플 거라는 걱정을 했다. 

  보호자도 관심 갖지 않는 어린아이에게 의사가 관심을 가져주자 말 많은 산모는 질투가 많이 나는 것 같았다. “저렇게 꼬리를 치고 다니니 밖에서 어떻게 하고 다닐지 안 봐도 뻔하다.”라며 왜 저 어린 나이에 산부인과 수술을 받았겠느냐며 또 막말을 했고 의사는 많이 당황해하며 내가 무슨 수술을 받았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비인후과 의사는 나이가 어렸던 것 같은데 그때의 내 눈에는 20대나 50대나 똑같이 나이 많은 어른이었다. 소아과가 아니고서야 초등학생은 병실에서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성인 환자들만 돌보던 이비인후과 의사 입장에서는 어린 내가 마냥 귀여웠던 것 같은데 그 날 이후로 그는 병실에 오지 않았다. 말 많은 산모의 막말은 병원 생활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의료진까지 멀어지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환자는 갑자기 병실을 옮기고 싶다고 보호자에게 요청했다. 나는 병실을 옮긴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병실을 옮겨달라고 이야기해봤자 들어줄 보호자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들었던 수많은 모욕적인 말들에 대해서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도, 나의 울분을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내 편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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