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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 Jan 27. 2021

호구조사

부부싸움

  삭막한 병원 생활에서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말없는 환자의 보호자와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슬펐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말속에서 고통받고 있을 때 아무 말하지 않아도 위로가 되주었던 언니였다. 언니는 우리 엄마에게 내가 혼자 있을 때 병실에서 오고 가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아이를 혼자 병실에 두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 언니 덕분에 프링글스라는 감자 과자를 처음으로 먹어봤다. 비싼 과자 같았는데 내 입맛에는 소금처럼 짜서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으나 침대맡에 고이 두었다. 

  말 많은 산모는 우리 가족의 호구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는 주 5일제가 시행되지 않던 때라 토요일에 아빠가 출근을 해서 엄마가 병실에 와 있었고 일요일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엄마가 교회에 가야 해서 아빠가 병실에 있었다. 우리 엄마가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교수라고 알아들은 듯하였으나 학생이라고 정정해주었다. 엄마를 바라보는 산모의 시선이 사뭇 달라진 것으로 보아 그녀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일요일에는 아빠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날은 산모의 남편도 병실에 와 있었다. 은행원이었던 아빠가 직장명을 이야기하자 산모 남편의 표정이 달라졌다. 진짜냐고 물으며 명함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는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아빠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대출이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러자 산모가 “말단이라 권한이 없어 하실 수 있는 게 많지 않으신가 봐요?”라며 비아냥 거렸다. 아빠의 그때 당시 직급은 부장이었다. 아무리 봐도 말단은 아니었다.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오랜 사회생활과 많은 사람을 상대했던 아빠는 웃으면서 다른 은행으로 알아봐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거라면서 좋게 말을 마무리했다. 이미 산모의 남편은 여러 은행에 대출 관련 상담을 받아본 듯했고 본인이 가진 자산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계속 본인의 상태와 현재 가진 자산을 이야기하면서 아빠에게 다른 방법이 없는지를 끈질기게 간구했다. 이야기 끝에 남편은 산모가 작은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아빠는 그 가게를 담보로 잡으면 대출을 받을 수도 있으나 자세한 것은 관련 서류를 봐야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대출금이 가게의 평수나 권리금 뭐 이런 것들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같았는데 내가 알아듣기는 힘든 내용이었다. 그는 산모에게 가게를 담보로 잡아 대출을 받자고 이야기했고 산모는 안된다며 펄쩍 뛰었다. 평화로운 주말에 병실에서 부부싸움까지 관람해야 했다. 

  부부간에 오가는 험한 말들을 들으면서 산모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 평소 이해가 되지 않던 그녀의 말과 행동들은 모두 자신의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병실에서 항상 부잣집 귀한 딸인 것처럼 이야기했던 그녀는 다른 사람을 내리 깔면서 본인이 얻고 싶은 것을 쉽게 얻어왔던 것 같다. 회사에서 말단이라 아무것도 못하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 거리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던 것 같다. 그녀는 타인의 감정을 긁는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 같았다. 

  다인 병실에서 환자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욕을 했던 터라 모두 말은 하지 않아도 그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주말에 부부싸움으로 병실을 시끄럽게 하자 할머니 환자와 보호자인 할아버지도 제발 조용히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한마디 했다. 말없는 환자는 하루빨리 병실을 옮겨달라고 간호사에게 재촉했으나 비어있는 병상이 없어 옮길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든 자리가 나면 새로운 환자가 들어올 텐데 이상한 사람이 들어와서 분란만 일으킨다면 회복에 방해만 될게 뻔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날 이후로 산모는 나에게 심한 막말을 하지 않았다. 호구조사의 영향 덕분인지 부모에게 이르지 않고 조용히 막말을 듣고만 있었던 만만한 어린아이를 조금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말조심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나에게 이 아줌마의 말은 더 이상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녀가 살아온 삶이 어떠했기에 그런 성향이 된 건지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저렇게 본인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면서 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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