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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 Feb 07. 2021

절교

치맛바람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급식실이 생겼고 더 이상 무거운 도시락을 가방에 챙기지 않아도 되었다. 급식 이전에는 교실에서 도시락을 먹었었는데 급식을 하게 되면서 전교생이 급식실이라는 별도 공간에 모여 줄을 서서 배식을 받게 되었고 영양사에게 급식 지도라는 것도 받게 되었다. 학부모들이 돌아가면서 봉사라는 명목으로 조리와 배식을 담당했던 것 같은데 치맛바람 좀 날리는 어머니들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점심시간에 친구들을 따라서 급식실로 들어갔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먼저 급식실을 경험한 친구들의 안내를 받아 학년별로 지정된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줄을 서서 배식을 받고 반마다 지정된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급식실 안은 전교생이 몰려 누가 누구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고 각종 조리기구가 돌아가는 쇳소리와 아이들의 웅성거림으로 시끌벅적했다.

  하루는 앞에 있던 친구가 그날의 반찬을 보더니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며 바로 급식실을 나가버렸다. 그 이유를 몰라 당황하였는데 곧 알게 되었다. 퇴식구 앞에는 고학년인 6학년 중에서도 지금의 선도부 같은 역할을 하는 친구들이 식판의 잔반량을 검사하여 남긴 음식이 있는 아이들은 다 먹을 때까지 급식실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았다. 싫어하는 반찬이 나오더라도 다 먹을 때까지 급식실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울면서 억지로 먹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나는 원체 먹는 양이 적기도 했고 입이 짧아 가리는 음식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자주 체하기도 했고 배탈이 많이 나서 엄마는 억지로 싫어하는 음식을 먹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배가 부른데도 남들 눈치를 보며 음식을 남기지 않기 위해 억지로 먹는 기색이 보이면 체할까 봐 못 먹게 말렸다. 억지로 먹고 체해서 아프면 병원비와 약값이 더 나온다는 것이 엄마의 지론이었다.

  나 역시 내키지 않는 반찬이 나오는 날은 급식을 다 먹지 못해 퇴식구로 가지 못하고 테이블에 한참 앉아있었다. 낯선 여자가 영양사라고 하면서 하얀 가운을 입고 조리대에서 나와 남아있는 아이들의 잔반을 체크하면서 다 먹어야 갈 수 있다고 한참을 훈계한 것 같다. 퇴식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선도부 두 명이 내 쪽으로 와서 영양사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 친구는 수술을 받아 몸이 성치 않기 때문에 억지로 모든 음식을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그냥 보내줘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6년 동안 오며가며 얼굴을 봐왔기 때문에 낯이 익었으나 같은 반도 아니었고 친구의 친구도 아니었으며 복도에서 지나가다 만나도 인사도 하지 않는 사이었는데 이렇게 나를 배려해주니 고마웠다. 영양사는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인정받은 선도부를 신뢰하는 눈치였고 앞으로 무리해서 억지로 음식 먹지 않아도 좋다면서 나의 퇴실을 허용했다. 나는 눈인사로 고맙다며 선도부에게 인사를 하고 급식실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친구들의 배려로 학교생활에 점차 적응할 수 있었고 6년 동안 인생을 헛살지 않았다고 느꼈다.

  어느 날 갑자기 나와 편지를 주고받던 다른 반 친구가 지금까지 내가 썼던 모든 편지를 돌려주며 더 이상 너와는 교우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로 세 명이서 친하게 지냈는데 6학년이 되면서 모두 다른 반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쉬는 시간에 간간이 편지지에 편지를 써서 서로 주고받던 사이였다. 그때 당시 우리 학교는 교내 우체통을 만들고 학생 우체부도 선정하여 편지 주고받기를 권장하고 있었다. 너무 황당했다. 이유를 물으니 친구의 엄마가 까마귀 노는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며 나와 같은 친구와는 절대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친구의 엄마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놀지 못하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나 역시 저런 태도로 나오는 친구와 굳이 우정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기에 편지들은 되돌려줄 필요 없이 알아서 직접 버리라고 말했다.

  세 명 중 나머지 한 명의 친구와는 계속 친하게 지냈고 이 친구와는 절교를 선언했기에 복도에서 마주쳐도 서로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내가 절교 사유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자신과의 관계에 애걸복걸하지 않자 오히려 그 친구가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매우 조용했으나 성격이 무난하고 둥글둥글해서 친구가 많았다. 같은 반이 아니더라도 친구의 친구들과도 등하굣길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친해졌고 집에서도 공부에 신경쓰는 편이 아니었기에 방과후는 학원보다 놀이터에서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절교한 친구와 함께 있던 친구가 나에게 인사를 하며 말을 걸어 대화를 하게 되는 상황이라도 생기면 본인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애매하게 서 있기 일수였다. 점심시간에 여학생들은 주로 공기놀이를 하거나 수다를 떨었는데 급식을 하게 되면서 같은 반이라는 교실의 경계를 넘어 급식실과 운동장에서 다른 반 친구들과도 자주 왕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절교한 친구를 불편해하자 다른 친구들이 그 친구를 모임에 껴주지 않았는데 그런 상황이 되풀이되자 본인이 소외되어 매우 난감한 듯 보였다.

  절교한 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나와 다시 친하게 지내기를 원한다고 했다. 절교도 사과도 모든 게 본인 마음대로인 이기적인 친구였다. 핑계삼아 절교하자고 했던 사유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설명했는데 들을수록 기분이 나빴다. 학부모 급식 봉사를 하기 위해 친구의 엄마가 학교에 오게 되었고 담임선생님에게 자녀의 교우 관계에 관한 상담을 받았다고 한다. 부모로서 자녀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에 대해 궁금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반 담임선생님이 내 이름을 듣더니 나의 수술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절대 가까이하지 말라고 조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나 역시 이런 일로 스트레스받아가며 이 친구와 가까이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나는 희애랑 친하게 지냈고 희애가 너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너와 친구로 지낸 거야. 너와 친하게 지낼 다른 이유는 전혀 없었어. 네가 사람을 가려가며 사귀는 것처럼 앞으로 나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 너처럼 남의 이야기만 듣고 나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친구는 필요하지 않아.”

  친구의 표정이 뭐 씹은 표정이었으나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기적인 친구까지 배려해줄 만큼 신체적, 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 친구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친구에게는 학교에 자주 오시는 치맛바람 좀 날리는 어머니와 동질 부류의 학부모 모임을 등에 업고 있었고 선생님들도 학부모 모임 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떠한 학부모도 행실이 바르지 않아 산부인과 수술까지 받은 학생과 같은 공간에서 자신의 아이를 교육받게 하고 싶지 않아 한다. 딸을 가진 부모는 자식이 물들까봐 꺼리게 되고 아들을 가진 부모는 자식이 여우의 꼬임에 넘어가 나쁜 길로 빠져들까봐 걱정을 하게 된다.

  이 친구의 엄마는 학부모 모임에서 산부인과 수술을 받은 학생의 정확한 사유와 그에 대한 학교 측의 대처에 대해 요구한 것 같다. 아마도 그 친구의 담임선생님은 임신이나 성교와 관련된 수술로 나를 몰아갔던 것 같은데 병원 진단서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내 병원 진단서를 나도 본 적이 없기에 정확히 어떻게 기재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질이 의심되는 무책임한 교사의 언행으로 자식과 관련된 일이라면 판단능력이 흐려지는 우매한 학부모를 자극해서 일이 커졌던 것 같다. 학부모 모임에서 관련 서류를 확인했던 것 같고 그들은 분노했다.

  그날 학교에서 학부모 회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우리 엄마는 6년 동안 단 한 번도 학교에 온 적도 없고 학부모 모임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기에 우리 집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그 모임의 중심축을 담당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을만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6살 때부터 다녔던 피아노 학원 원장선생님이다. 원장선생님에게는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는데 아들은 우리 언니와 동갑이었고 딸은 나와 동갑이었으며 우리는 한글을 떼자마자 같은 피아노학원에서 함께 생활했고 같은 초등학교를 6년 동안이나 다녔다. 우리 집이 육교 넘어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피아노학원을 옮기게 되었는데 옮긴 학원도 원장선생님이 추천해준 학원이었다.

  학부모 참관 수업이나 학부모 회의 등 주요 모임이 있는 날은 원장선생님을 학원이 아닌 학교에서 볼 수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 꽤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계셨던 것 같다. 그날 갑자기 원장선생님이 우리 반으로 와서 나를 안아주었고 나의 건강상태가 어떤지, 체력이 괜찮은지에 대한 걱정과 위로의 말을 해주었는데 너무 따뜻했다. 나는 원장선생님에게 체력이 점차 회복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켰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친구의 어머니도 나를 찾아와서 몸이 괜찮은지를 물었고 나의 외모를 유심히 보는 게 느껴졌다. 옷차림이나 얼굴을 보면 대충 그 사람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기에 용모단정 여부가 중요했을 수도 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친구의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나에 대해 물어봤다고 했다. 다들 하나같이 너무 착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친구라고 했다면서 착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더 아픈 법이라며 나를 걱정해주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평판조회를 그때 당했던 것 같다. 나는 반에서 5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고 평소 교우 관계나 이성에 대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을 6년 동안 나를 지켜봐왔던 친구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나의 평소 행실이 바르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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