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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 Feb 11. 2021

성숙

남녀공학

  졸업을 앞두고 초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겨울방학을 보냈다. 몇 개월 뒤 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는다는 설렘과 연말과 겹친 세기말의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이었다. 일어나자마자 두통과 어지러움으로 짜증이 약간 난 상태로 방에서 나왔다. 거실에서 TV 보던 동생에게 대뜸 왜 거기서 걸리적거리냐며 화를 살짝 내고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팬티에 약간의 혈흔이 묻어 있어 한참을 멍하게 보다가 곧 초경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산타할아버지 선물은 7살 때 유치원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오라고 부모에게 강제로 가정통신문을 보냈을 때 한 번 받아본 기억밖에 없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선물로 내가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님을 통보받게 되었다. 화장실을 나와서 동생에게 이유없이 화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중학교 입학은 소위 뺑뺑이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1순위부터 원하는 중학교를 적어서 내도록 되어있었는데 내가 살고 있는 지역구는 남녀공학 학교가 몇 없었고 전부 여자, 남자 중학교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1순위로 적어낸 여자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몇 개월 뒤 다른 지역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를 가게 된 아파트는 단지 내 걸어서 5분 거리에 2개의 중학교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학원선생님은 이사가는 지역의 학군이 더 좋기 때문에 전학가는 것을 추천했다. 기존에 다니던 학교에 등교하려면 북적거리는 지하철을 50분 정도 타야 했고 왕복 약 2시간의 통학시간이 걸렸다. 새 학교로 전학을 원하는지에 대해 엄마는 나와 언니의 의견을 물었다. 언니는 중학교 졸업이 몇 달 남지 않았고 어차피 고등학교에 진학할 예정이라 전학 갈 생각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때 당시 사회적 문제로 뉴스에 심각하게 보도되던 왕따 문제를 언급하며 새로운 환경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학교를 3년 동안 다녀야 하는 게 걱정이라 전학은 가지 않겠다고 했다.

  사유는 그럴듯하였으나 차마 엄마에게 말하지 못한 다른 걱정이 있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두 학교 모두 남녀공학이었다. 이사 온 지역은 신도시로 생긴 지 오래되지 않은 남녀공학 학교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이전의 경험을 통해 불미스러운 일은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것이 개인의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남녀 간의 친구로서의 우정도 보는 시각에 따라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트라우마다. 아무리 내가 행실을 조심해도 남의 말이 만들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는 것과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기득권인 어른을 상대로 학생이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부모 역시  개인으로서 자식보다 본인의 삶이 중요했고 나에게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지 못했기에 신뢰할 수 없었다.

  바쁜 아침 통학의 최단 거리는 아파트 단지 내 2개의 중학교 사이 큰길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었는데 나의 교복이 그들과 달라 너무 눈에 띄었다. 교복을 보고 나를 붙잡고 어느 학교인지 물어보는 학생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공장폐수가 흘러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하천이 있는 공원 사잇길로 멀리 돌아서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야 했다.

  여중을 졸업하고 여고에 진학했다. 인근의 남학교 학생과 건전하게 교제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으나 나는 학창시절 단 한번의 이성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만 할 수 있는 풋풋하고 순수한 만남이 있었을 텐데 그런 것들을 한 번도 누려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으나 애매한 수능 성적으로 인해 어쩌다 보니 여대를 가게 되었다. 입학하고 3개월 동안은 같은 학과 선배와 친구들의 주선으로 미팅과 소개팅을 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이공계 특성상 실험 과제와 매주 쏟아지는 엄청난 레포트의 압박으로 기회는 점차 사그라들었다. 여학생들은 학점에 목숨을 걸기 때문에 1학년 때부터 과제와 시험공부를 치열하게 한다. 또한 다이어트로 인해 술자리도 거의 참석하지 않아 노는 모임 자체가 성립되기 힘들었다. 같이 놀 동기가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고 성적장학금 수혜와 조기 졸업까지 할 수 있었다.

  졸업 후 고등학교에서 1년 동안 근무를 했다. 이후 짧은 회사생활을 했으나 대학교로 이직하여 행정업무를 하게 되었다. 학교와 행정직은 여초 집단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 10여 년의 학창 시절을 여자들하고만 지냈기에 이런 분위기가 익숙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처럼 어릴 때 남들보다 아팠던 경험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잘 알아채지 못하는 상황도 예리하게 잡아내는 섬세한 감성이 발달했고 감수성이 예민해 타인의 감정에 대한 배려와 공감 능력이 우수했다. 이러한 성향 때문인지 경영학을 전공하지 않은 이학사 출신임에도 인사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업무는 예민한 나를 너무 괴롭게 했다. 나에게 접근하여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은 모두 의도와 목적이 있었다. 나 역시 업무적으로 모두의 요구를 원하는 대로 맞춰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현실의 자원과 자리가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모두가 만족하는 합리적인 결말은 불가능하다. 때로는 조직 구성원의 일부만 만족하거나, 모두가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지만 아무도 불만을 품지 않는 결론을 도출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모든 문제는 답이 정해져 있다. 특히나 수학능력시험의 수리영역에 출제된 문제들은 풀이 방식만 안다면 도출되는 답안이 너무나 명확하다. 출제오류의 이의제기를 피하기 위해 풀이 과정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문제만 나오기 때문이다. A3 크기의 시험지 안에서 알려주는 세상은 출제 의도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만든 문제와 명확한 답이 있는 념적인 세계였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세상만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나는 조직의 경영악화로 인한 내부 갈등과 구성원들의 불만 및 각종 요구에 하루 종일 시달리느라 지쳐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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