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물건에 깃드는 정과 추억
저는 물건에 대한 정이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한 번 들이면 바꾸지 않고 최대한 오랫동안 씁니다. 기분전환을 위해 금방 새로운 것으로 휙휙 바꾸지 않지요. 오래 사용할수록 더 정이 들어, 아무리 근사하고 더 품질 좋은 물건이 나와도 혹하는 일이 없습니다. 요즘은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해 보겠다며 물건을 의식적으로 더 줄여나가다 보니 집 안에 남아 있는 물건의 존재감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곤 합니다.
집 안의 물건들은 제각기 들이게 된 출처도 시기도, 사용하는 이유도 다릅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많은 물건 중에서도 제가 유난히 애틋하게 여기는 물건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바로 ‘스토리’가 있는 물건입니다. 오늘 얘기해 볼 물건은 전기 포트와 선풍기입니다.
지금 제 자취방에서 쓰고 있는 전기 포트는 제가 어렸을 때 본가에서부터 쓰던 오래된 제품입니다. 다소 유아틱한 빛깔의 분홍빛에 요리사 모자를 쓴 키티가 그려져 있는 전기포트지요. 밑바닥을 살펴보면 제조년월이 2009년 4월. 그해에 샀다면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함께 지내온 셈입니다. 세월을 무시할 수 없어 군데군데 손때가 타고 칠이 벗겨져 있기도 합니다.
14년이나 된 제품이니만큼 이렇다 할 기능이 가득한 제품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무엇보다 기본에 충실합니다. 딱 필요한 버튼과 동작만이 있어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레버를 내리면 빨간 불이 들어오며 물이 끓기 시작하고, 손잡이 안쪽 부분은 손가락 형태를 따라 굴곡져 있어 잡을 때 편안합니다. 손잡이 위쪽 부분의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직각으로 뿅 열어지고, 새 부리처럼 앙증맞게 튀어나온 오목한 입구로 물을 따를 수 있지요. 무엇보다 이 전기 포트의 가장 사랑스러운 점은 표면에 표시되어 있는 리터 표시와 그림들입니다. 0.6L 되는 지점에 귀여운 커피잔이 그려져 있고, 미니멈과 맥시멈을 가리키는 위치에는 각각 파란 작은 별과 분홍색 큰 별이 그려져 있어 무척 귀엽습니다.
한편 여름마다 사용하고 있는 노란 선풍기 또한 본가에서부터 사용하던 물건입니다. 서울에서 새 제품으로 사라는 엄마의 말을 거역하며 전주에서부터 싣고 올라왔지요. 엄마가 말하길 혼수 제품이었다고 하니, 저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셈입니다. 한 26년 정도 되었을까요. 요즘 시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버터 옐로 컬러에 세월에 따라 빈티지하게 바랜 빛깔이 매력입니다. 다만 너무 오래된 탓에 돌아갈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서 밤에 잘 때는 조금 시끄럽다는 불편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감수하고 싶을 만큼 정겹게 느껴지는 물건입니다.
이 외에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용하던 물건들이 제 방에는 꽤 많습니다. 엄마가 키티를 좋아해서 제가 어렸을 때 사용하던 거의 모든 제품은 키티 제품이었는데요. 그래서인지 지금 제가 쓰는 커터칼도, 12cm 자도 키티 제품입니다. 요즘은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앙증맞은 디자인이라 더욱 희소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렇듯 물건은 오래 쓸수록 그것만의 이야기가 깃듭니다. 유행 따라 잠깐 사서 즐기다 신상품이 나오면 또 바꾸는 물건에는 깃들 새가 없는 정겹고 소중한 이야기들이, 애틋한 마음으로 몇 년이고 꾸준히 쓰는 물건들에는 배기 마련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내오는 가장 오랜 친구 S는 제 방에 놀러 와 선풍기와 전기 포트를 보고 완전 추억이라며 감탄을 지르기도 합니다. S가 저희 본가에 놀러 왔을 때부터 보았던 물건이니까요.
이렇듯 스토리가 차곡차곡 쌓인 물건은 나다운 일상을 영위하는 데 있어 특별한 보물이 되어줍니다. 그러한 물건으로 둘러싸인 방은 더욱 아늑하고 다른 이의 방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내 방만의 정취를 만들어 줍니다. 몇 번이고 낯선 집으로 이사해도, 이 물건들과 함께라면 순식간에 정겨운 나의 방이 됩니다.
집 안을 둘러보면 이미 켜켜이 세월과 추억이 쌓인 물건들도 있고, 별 감흥 없이 새롭게 들인 물건들도 있을 테지요. 후자의 물건은 앞으로 스토리가 깃들 가능성을 품은 소중한 물건입니다. 요즘의 기술을 반영한 신상품도 좋지만, 나와 오랫동안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 갈 물건들을 신중하게 들이고 사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마 새로운 것을 사용하는 것 못지않은 설렘과 기쁨을 안겨다 줄 것입니다.
<오늘의 기본> 2023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은 늘 중요합니다. 나다운 중심을 지키는 오늘의 질서가 되어 줍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느꼈던 소소한 깨달음과 교훈, 생활의 규칙과 태도 등 삶을 더욱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라이프마인드(Lifemind)'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작가 마쓰우라 야타로 씨가 일상에서 느꼈던 생활의 힌트들을 틈틈이 기록한 <생활의 수첩>에서 영감을 받아 연재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 함께 나다운 기본을 찾아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