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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시 Jun 06. 2023

사물마다 안온한 집이 있습니다

사물에 마음을 쓰는 일, 북커버와 연필캡

전 가방에 늘 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를 들고 외출합니다. 그럴 때마다 사물에 마음을 써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연필심이 안전하도록 혹은 가방이 안전하도록 연필캡을 씌워야 하고, 책이 구겨지지 않게끔 가방 속 물건들의 위치를 세심히 바로 잡거나 이왕이면 흠집이 덜 생길 재질로 된 표지의 책을 고릅니다. 그 까닭에 그렇지 않아도 요즘 마음에 드는 북커버 하나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요. 마침 그동안 쓰고 있던, 예전에 문구점에서 급하게 산 플라스틱 연필캡도 잃어버린 참에 저번 주말엔 연필캡과 북커버를 하나씩 샀습니다.


연필캡. 무척 작고 별 볼 일 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신중히 골랐습니다. 연필캡 하나를 사기 위해 성수동에 있는 유명한 문구숍에도 갔는데요. 색깔과 디자인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며칠 후에 연남동의 연필숍에 들렀습니다. 저에겐 점보 연필도 있으니 넉넉한 사이즈로, 가장 좋아하는 가죽 소재에, 세 가지 컬러 중에서는 밝은 나무 컬러로 골랐습니다. 연필숍에 들린 김에 연필캡에 꽂아 바로 카페로 가 쓸 연필도 하나 샀습니다.


북커버를 사기 위해서는 서촌을 찾았습니다. 전에도 몇 번 들러 살까 말까 고민했던 제품이었는데, 역시 그만한 게 없겠다 싶어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요. 두툼하고 깨끗한 광목으로 만든, 자연스럽고 포근한 감촉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 또 손길을 더해 매듭을 묶어야 하는 끈 디테일도 귀엽고요. 그렇게 바깥에서의 여유로운 독서를 위한 나만의 작은 세팅이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북커버와 연필캡을 들고 카페에 나선 주말.


사물마다 집이 있습니다. 이 생각을 하게 된 건, 우리 조상들의 옛 생활의 물건을 수집해 놓은 도감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그 도감을 보면서 선조들이 물건을 바라보는 아주 특별하고 귀여운 시선을 발견했는데요. 바로 온갖 물건마다 그에 맞는 집을 만들어 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갓을 보관하는 갓집, 비녀를 보관하는 비녀집, 술병과 안주를 넣어두는 주안함, 글쓰기에 필요한 도구를 담아 둔 연상, 붓을 걸어두는 붓걸이, 편지나 문서를 보관하는 고비까지. 이 밖에도 다양한 쓰임새의 '집'과 '합', '함', '상'들이 있었습니다. 물건의 쓰임새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바라보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시선을 정말이지 신사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이처럼 사물에도 안온한 집이 필요합니다. 오래도록 소중하게 쓰이기 위해, 그 모양새와 쓰임에 딱 어울리는 자리에서 고운 태로 기다릴 수 있는 자리 말입니다. 사물을 위해 사소한 마음을 쓸 때, 사물들은 나의 부름에 언제든 정겹게 응하겠지요.


비단 연필이나 책뿐 아니라, 편지든 펜이든 아무 데나 놓아두면 그만인 것이 요즘 현대인의 일상입니다. 하지만 사물들을 위해 정갈한 자리를 마련해 준다면, 물건 하나하나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시선은 한층 가지런해지고 우아해질 것입니다. 사물이 제대로 된 자리에 놓이는 것은 곧 나의 일상이 제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물마다 집을 만들어준다면 어떤 모습일까 한 번 재미있는 고민을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충만한 생활의 작은 힌트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오늘의 기본> 2023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은 늘 중요합니다. 나다운 중심을 지키는 오늘의 질서가 되어 줍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느꼈던 소소한 깨달음과 교훈, 생활의 규칙과 태도 등 삶을 더욱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라이프마인드(Lifemind)'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작가 마쓰우라 야타로 씨가 일상에서 느꼈던 생활의 힌트들을 틈틈이 기록한 <생활의 수첩>에서 영감을 받아 연재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 함께 나다운 기본을 찾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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