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하고 수수한, 보살핌의 힘
저의 잠옷 역사는 꽤 깁니다. 태어나자마자 지금까지 장정 24년 정도 되었을까요. 늘어진 반팔 티셔츠나 옛 학교 체육복, 추리닝 바지 등을 입고 잔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다 못해 학창 시절 수련회나 수학여행에서도 혼자 꿋꿋이 잠옷을 입었고, 회사 동료들과 워크숍을 갈 때도 잠옷을 챙겨 갑니다. 아무쪼록 제대로 된 잠옷 그러니까 영어로 'pajama'이라고 하는 잠옷을 평생 입어 왔습니다. 모두 어릴 적부터 엄마가 한 벌씩 사다 준 잠옷들입니다.
늘어진 편한 차림이 아닌 '잠옷'을 입어 보세요, 라는 말은 일상의 안락함을 중요시 여기는 분들이라면 종종 얘기하는 화두 같습니다. 그러니 새삼스레 다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단순히 잠옷을 입는 것을 넘어, 잠옷을 고르는 것에 담긴 풍요로운 시선에 대해서 말입니다.
스무 해 넘게 잠옷을 입는 생활을 해 왔는데, 역설적이게도 한 번도 내가 직접 고른 잠옷을 입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얼마 전엔 줄곧 고민해 오던 '내 손으로 잠옷 고르기' 의식을 치러보았습니다. 오롯이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 좋아하는 소재, 좋아하는 브랜드의 잠옷을 고르고 말겠다는 담백한 결의를 하고서, '나는 내가 꾸린 이 안락한 집 안에서 어떤 잠옷을 입고 싶을까?'하고 조용히 고민했습니다.
여러분은 잠옷을 골라본 적이 있으신가요? 잠옷을 고를 땐 보통의 옷을 고를 때와는 자세부터 달라지지 않는지요. '어떻게 보일까'보다는 '얼마나 편안할까'라는 질문부터 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바깥에서 입는 옷을 살 때는 남의 시선을 신경 쓰기 마련입니다. 옷의 종류 별로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통용되는 기준도 있지요. 그래서 외출하는 옷을 살 때는 바깥에서 바라본 나의 스타일을 염두하고 고릅니다. 어떻게 보일지, 어떤 취향의 사람으로 보일지, 얼마나 다리가 얇아 보일지... 이것저것 가늠하면서요.
하지만 잠옷을 고를 때는 '인파 속 도시의 거리를 누비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집 안을 조용히 거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 장면 속에는 좋아하는 잠옷을 입은 나의 모습은 물론 거실의 풍경과 부엌의 탁자, 침대 등의 가구, 반려견이나 반려묘, 카펫이나 실내화 등 집 안의 안락한 물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잠옷을 고르는 일은 외부에 맞춰져 있던 시선을 내부, 즉 나의 가장 사적인 반경으로 돌려 그곳에 놓인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꼭 어울릴 만한, 나의 안위를 위한 컬렉션을 신중히 고르는 일이지요. '취향' 이전의 '보살핌'의 결핍을 해소하고, 풍요를 넘어 안전의 감각을 선사합니다.
남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옷이 아니라, 아무쪼록 나에게 가장 편안하게 감기는 옷을 고른다. 그것이 잠옷 고르기의 가장 기본적인 기준입니다. 그 결과 나에게 가장 안락하고 수수한 차림이 탄생합니다. 조금 통이 넓어도, 칙칙한 색이거나 화려한 체크여도, 아무렴 좋지 않을까요. 이번에 잠옷을 고를 때의 저의 기준은 이러했습니다.
1. 면 100% (면 100%만큼 산뜻한 소재도 없습니다. 실크를 선호하는 분도 계실 테지요.)
2. 소매가 짧지 않을 것 (손목과 발목이 드러나면 생각보다 서늘하거든요).
3. 민무늬의 하얀색으로. (집 안에 있는 것은 가능한 한 단순한 디자인을 고르고 싶습니다)
저녁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제가 고른 잠옷으로 갈아입으면 자신감은 물론 나의 생활에 대한 책임감까지 살포시 솟아납니다. 잠옷을 하나 고르는 일이 나를 위한 보살핌으로 이어집니다. 집 안에서 안락하게 있을 수 있는 옷으로 갈아입는 행위는 생활의 '모드(mode)'를 바꾸는 가장 단순한 방법인 동시에, 내가 이 공간에서만큼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있을 것인지 결정하는 일입니다.
곧 겨울이군요. 민낯으로 입을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수수한 잠옷을 내 손으로 골라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