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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인의 풍경이 됩니다

물건에 기분을 담는 방식

by 위시

누구에게나 아침부터 심사가 뒤틀리는 날이 있습니다. 목요일 아침, 친구에게 손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을 찾았습니다. 예쁜 편지 봉투에 우편 정보를 적고 싶지 않아 따로 우체국 봉투에 넣어 부칠 심산이었지만 미세하게 크기가 맞지 않았습니다. 에잇, 싶은 마음으로 하는 수 없이 편지봉투에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적어 창구로 갔습니다. 하지만 날아오는 말은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 위치가 뒤바뀌었어요!.” 아뿔싸. 큰 서류용 봉투를 구매하고 주소를 다시 적어 오라는 말에, 그만 기분이 고약해졌습니다. 평소라면 그렇게 빈정상할 일도 아닌데 말이지요.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 주소를 쓰려다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내팽개치듯 내려놓았습니다. 그때 앗, 하는 기분과 함께 개나리색의 뽀얀 편지에 살포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손편지에 분노를 싣다니...”. 편지에 방금 가지런히 적은, 애정하는 친구의 이름이 저를 가볍게 꾸짖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회사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한 기사님을 만났습니다. 돈을 제대로 내지 않은 한 할머니 승객에 화가 나 계속 구시렁거리던 기사님은 그 후 몇 정거장을 지나는 내내 버스의 문을 여는 레버를 거칠게 ‘때리듯’ 올리고 내렸습니다. 앞 좌석에 앉은 저는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감정은 타인의 풍경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요.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주변 승객들에게 어떻게 해달라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기사님의 무자비한 손길을 받아내며 홱, 홱, 모가지가 꺾이던 레버 주변에 감도는 폭력과 긴장의 장면은 그날 저의 아침 풍경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모름지기 감정은 원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겉으로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주로 말이나 표정으로 드러나지만, 우리는 종종 애꿎은 물건을 빌려 기분을 드러냅니다. ‘남한테 뭐라 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 화풀이하는 것뿐인데 그게 나쁜 일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분을 드러내는 데 물건을 사용하는 순간, 기분이 물리적으로 형상화되어 버립니다. 한 사람의 속에서만 간직될 수 있었던 무형의 감정이 형체를 띄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상화된 감정은 더 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파동을 발생시키듯, 타인의 풍경에 거친 긴장을 일으킵니다.


어릴 적 저는 그릇을 통해 엄마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가 설거지를 할 때면, 엄마의 기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방 쪽에서 그릇들이 깽, 하고 던져지고 부딪히는 거친 소리는 아직도 제 안에서 불안하고 푸르뎅뎅한 유년의 풍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은 일하고 돌아와서 집안일을 해야만 하는 엄마의 서운함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물건을 통해 내비치는 날 선 감정은 결코 다른 사람을 향한 다정함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건에 화풀이를 한다는 것은, 실은 우쭐해하는 것입니다. 나의 기분 상태를 타인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나의 기분에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물리적으로 형상화된 감정은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종종 “나 지금 기분 상했어“라는 감정을 물건을 통해 어리광 부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타인이 내 감정을 알아주길 바란다면 물건을 통해서가 아닌 제대로 된 언어로 표현합시다. 그게 아니라면 점잖게 혼자서 해결하는 요령을 연습합니다. 보이지 않는 감정과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 타인의 풍경으로 전하는 일은 다르게 보면 마법과도 같은 일입니다. 각자가 가진 그 고유한 마법을 따뜻하고 다정하게만 사용해 보는 건 어떨까요?


비단 나의 기분만이 아닌 나의 자세와 표정, 옷차림 모든 것이 타인의 풍경이 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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