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거기 있을 것에 대한 작별의 찬사, 영화 <콜럼버스>
제목 : 콜럼버스(2018)
감독 : 코고나다
러닝타임 : 108분
아름답고 농밀한, 한여름의 대화
모더니즘 건축의 메카, 콜럼버스. 독특한 침착함이 감도는 예술적인 소도시에 여름이 깔리고,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이곳에 발걸음을 하고 맴돌고 있다. 어느 흐리고 평화로운 오후, 콜럼버스에서 강연을 앞둔 건축학계의 저명인사 이재용 교수가 병으로 쓰러졌다. 갑작스레 침투한 비일상은 이곳에 위치한 건축물만큼이나 여유롭고 잔잔한 일상 속 만남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도서관 계약직 사서로 일하지만 속으로는 건축 공부의 열망을 품고 있는 콜럼버스 토박이 소녀 케이시와, 아버지 이재용 교수의 병환 소식으로 원치 않게 이 도시를 찾은 한국계 미국인 진의 이야기. '건축'을 매개로 한 더디지만 농밀한, 다정하고 지적인 두 사람의 대화가 한여름 속에서 무르익는다. 건축에 진저리를 표하지만 실은 누구보다 건축에 깃든 지혜와 미감을 이해하고 있는 진, 그리고 건축을 애정하는 순수한 마음을 품었지만 그 마음이 이끌어 줄 자신의 내일을 애써 부정하는 케이시. 얼핏 비대칭적 불균형을 이루는 두 사람의 처지는 아이러니하게 균형 잡힌 교차점을 만들어 낸다. 일상을 산책하며 유명한 건축 스팟들을 찾아가고, 그 안에서 자신의 어제를 바라보고, 마침내 건축으로 회귀하는 두 사람만의 각기 다른 방식. 좋아하는 것이 있지만, 벗어나고 싶은 애증의 도시에서 그들은 '뿌리'로부터의 위로를 발견한다.
떠나고 싶은 곳에 좋아하는 건축이 있다는 것
건축은 이동하지 않는다. 서 있는 땅과 밀접한 조화를 맺으며, 그곳으로 흘러들어오는 모든 빛과 소리와 사람과 그늘을 솎아낼 뿐이다. 어쩌면 콜럼버스를 떠나지 못하는 케이시도 마찬가지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고향에 발이 묶여, 그저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부신 꿈과 소음과 사람(특히나 과거에 알콜중독자였던 엄마)과 그늘을 솎아내고 매 순간 비질하듯 쓸어낸다. 그런 면에서 이 도시 위의 건축과 케이시는 닮아 있다.
"모든 게 엉망인 그 순간, 평생을 지낸 이곳이 갑자기 달라 보였어요. 마치 딴 세상에 온 것처럼요."
-늦은 밤, 어윈 유니언 뱅크 앞에서 상처를 털어놓는 케이시
콜럼버스에 있는 눈부신 건축들은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케이시에게 있어 위안인 동시에, 떠나지 '않으려는' 그녀에겐 좋은 변명이 되어 준다. 이곳엔 내가 좋아하는 건축물이 있으니, 이곳이 충분히 좋고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말로 진실하고 절박한 꿈을 애써 부정한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현실을, 실은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말로 변명하는 말의 중심엔 사랑하는 건축이 있다. 부동의 건축에 대한 애정은 자신이 떠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거라고 말하는 데 있어 매혹적인 변명이 된다. 건축은 영구적으로 그곳에 있을뿐더러, 특히 고향에 있기에 더욱 그렇다. 케이시에게 있어 고향의 건축들은,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뿌리인 셈이다.
움직이지 않는 뿌리에서 발견하는 위로
그리고 여기 건축을 뿌리로 가진 또 다른 사람, 진이 있다. 애증하는 아버지가 매료되었던 학문인 건축은 자연스레 그의 뿌리를 이루고, 이따금(지금 그가 콜럼버스에 와 있는 것처럼) 성가시게 옭아매 왔다. 그렇지만 콜럼버스에 와 건축들을 바라보며 '치유'를 읊는 그는, 그동안 뿌리와 떨어져 산 이방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위로를 다시금 건축이라는 뿌리에서 찾는다. 그가 아버지와 대면한 관계를 가져온 오랜 세월 동안, 그리고 우연히 다시 찾게 될 동안, 역시나 건축은 어딜 가지 않고 여전히 콜럼버스에 있었다. 원치 않은 비일상으로 인해 이 도시로 내몰려진 것처럼 보인 그는, 실은 더욱 성숙한 일상을 위한 느린 템포의 회귀를 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폴셱이 생각한 건축은 치유 예술이었어요. 건축에는 회복력이 있고, 책임은 건축가에게 있죠. 건축가가 책임지고 건축물에 치유 기능을 부여하는 거죠."
-콜럼버스 지역병원을 바라보는 진.
움직이지 않는 건축, 그리고 그 건축이 들어선 도시를 중심에 두고 기호와 변명을 얘기하는 이들. 외면하거나 부정하고자 했던 뿌리를 인식하고서야, 비로소 떠날 수 있음을 알아가는 두 사람은 아름답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정체된 도시에서 꿈을 이야기하고 상처를 회복하고, 위로를 구하고 새로운 다짐들을 한다.
늘 거기 있을 것에 대한 작별의 찬사
케이시는 결국 건축을 공부하고 싶다는 꿈을 안고 고향인 콜럼버스를 떠난다. 그러나 그녀가 애정하는 건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앞으로도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에서 나온 대사인 'It can wait.', '파리는 어디 가지 않아요'처럼. 떠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되었던 고향의 건축은, 오히려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으니 다음을 기약하고 걱정 없이 떠나올 수 있는 든든한 뿌리가 된다.
20여 년 간 태어나고 자란 고향 전주에서, 오랫동안 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케이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난 그때까지도 이 도시에서 나를 붙잡을 만한 어떠한 움직이지 않는 무엇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 서울에 와서야 비로소 내가 전주에 있던 많은 것들을 사랑해 왔음을,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그 도시가 나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뿌리임을 인식했다. 그것을 깨닫고는 한동안 마음이 쓰렸다. 이곳을 떠나와버린 지금의 현실에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이따금씩 찾았다가, 그리움을 품고 되돌아서는 고속버스의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조용한 거리와 아름다운 전주천, 정겨운 사람들이 눈에 밟혔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움직이지 않기에,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있다. 비록 전주를 떠나왔지만 언제든지 돌아가서 언제나 늘 그곳에 있을 것들과 만날 수 있다는 안심으로 서울에서 살아가듯. 케이시가 사랑하는 건축을 고향에 남겨두고, 더 큰 꿈을 향해 다른 곳으로 떠난 것처럼. 그리고 한편, 금방 콜럼버스를 떠날 마음이었지만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이곳에 집을 구하기로 한 진처럼. 우리는 남겨두고 와도 어디 가지 않을 것들을 믿고서, 함께해왔던 것들에 작별 인사를 건네고 영원한 다음을 기약한다. 그렇게 여물고 저물어 간 한여름, 아름다운 도시와 건축에 대한 찬사, 영화 <콜럼버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