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을 붙잡은 빛과 사물의 하모니
어릴 적 해가 진 늦은 시간까지 불을 켜지 않고 방 안에서 조용히 사부작거리고 있으면 꼭 듣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불도 안 켜고 뭐 해? 어둠의 자식도 아니고.” 비 오는 날이면 학교에서도 꼭 몇몇 선생님들께 듣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어둠의 자식’은 그늘진 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이를 꾸짖는 고유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하루 중 해가 질 무렵에는 꼭 '어둠의 자식’을 자처하곤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결코 빛이 싫어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햇빛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조건은 채광, 인생에서 절대로 사지 않을 것 같은 물건 1순위는 암막커튼일 정도이지요.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빛을 좋아하기 때문에, 초저녁이 되어도 형광등을 최대한 늦게 켜고 싶어 버티곤 합니다. “어떻게 형광등까지 사랑하겠어, 햇빛을 사랑하는 거지” 뭐, 이런 심정이랄까요.
저는 형광등을 비롯한 인공광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가 져서 방 안이 온통 캄캄해져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되도록 불을 켜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그리고는 방 안 곳곳, 책상 위 사물들 사이로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봅니다. 희미하게나마 낮을 붙잡고 있는 공기가 책의 문장을 은은하게 밝히고, 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 궤적을 좇다 보면 어느새 확 어두워져 있는 방을 볼 수 있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캔들 워머를 켜 얼마간 더 버티고 나서야, 이제 그만 저녁을 맞이하자는 마음으로 방 안의 불을 켭니다. 그러면 햇빛 아래 자연스럽게 드리워졌던 사물들의 그림자가 무언가에 내쫓기듯 홱 달아나는데, 그 순간이 얼마나 아쉬운지 모릅니다. 명암을 지닌 모든 사물의 고유한 빛깔과 그늘을 앗아가는 인공광이 얄미워지지요.
비 오는 날에도 집 안의 불을 켜지 않은 채, 명암의 대비가 옅어지고 사물의 경계가 희미해진 어둑한 분위기를 즐깁니다. 책을 읽을 때면 캔들 워머의 작은 불빛에만 잠시 의지하는 정도입니다. 퇴색된 빛깔만큼 평소보다 유난히 고요해진 사물들의 침묵을 어루만지다 보면, 빛은 어쩌면 소리를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자연이 만들어내는 있는 그대로의 풍정에 몸의 감각을 오롯이 맡기려고 합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늘 자연을 내쫓는 생활을 합니다. 화창한 아침부터 형광등을 쨍하게 켜 둔 사무실에 출근해, 하루동안 햇빛이 어느 방향으로 기우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그대로 저녁을 맞이합니다. 비 오는 날이면 유독 창백한 형광등 아래 머물며, 지금이 낮인지 저녁인지도 모를 어두운 바깥을 외면하고요. 언젠가 대낮에 지인의 집에 방문했는데, 햇빛이 들어와 충분히 밝은데도 형광등이 환히 켜져 있는 방 안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집 안에서도 일어나자마자 습관처럼 불을 켜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취향에 가까운 문제로, 사물 본연의 빛깔이라느니 자연이 연출하는 순수한 조도 따위는 아무래도 좋고 이왕이면 '쨍하니 밝은 것’이 개운해서 좋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인공적으로 연출된 생활 속에 습관처럼 과도하게 노출되어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돌아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몸과 감각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 리듬에 맞춰진 생활을 따르다 이따금 사뭇 불편한 순간들을 마주할 망정이라도요. 스위치를 딸깍, 누르는 것만으로 손쉽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현대 조명 기술의 산물에 의지하는 것은 무척 편리하나, 편리함을 대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본연의 미학이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해가 질 무렵, 집 안이 어두컴컴해졌지만 아직 보일 건 다 보이는 시각. 매직아워 직후의 그 시간은 제가 보물처럼 여기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을 충실히 느끼기 위해 저는 자주 사부작거립니다. 문득 생각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아끼는 책을 읽거나, 미뤄뒀던 소설을 쓰기도 하지요. 잠깐 집중하는 새에 금방 달아나버리는 찰나의 시간을 오롯이 품는, 하루 중 특별한 의식입니다. 불을 켜는 순간부터 저의 저녁은 시작됩니다. 자연이 기다려 주고 스스로 준비한 저녁이 말이지요.
자연은 보기보다 훨씬 다채로운 빛깔을 품고 있습니다. 화창한 날, 흐린 날, 비 오는 날 심지어 하루 중에서도 시시각각 빛의 색과 방향을 달리하지요.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자연의 빛깔과 사물이 맞닿아 이루어내는 하모니를 일상 속에 들여 보세요. 의외로 당신도 햇빛을 그리고 햇빛이 저문 이후의 어두운 그늘을 사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기본> 2023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은 늘 중요합니다. 나다운 중심을 지키는 오늘의 질서가 되어 줍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느꼈던 소소한 깨달음과 교훈, 생활의 규칙과 태도 등 삶을 더욱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라이프마인드(Lifemind)'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작가 마쓰우라 야타로 씨가 일상에서 느꼈던 생활의 힌트들을 틈틈이 기록한 <생활의 수첩>에서 영감을 받아 연재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 함께 나다운 기본을 찾아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