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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맞는 월동준비를 합니다

집에게 건네는 '수고로운' 안녕

by 위시

제 자취방은 겨울만 되면 곤욕을 치릅니다. 7-80년대 지어진 전형적인 다세대주택이라, 아무리 실내 리모델링을 새로 해도 감출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있지요. 벽지의 곰팡이나 외풍도 그렇지만, 가장 큰 골칫거리는 옷장 속의 결로입니다.


그동안 겨울철 결로와 습기로 고생해 본 적 없던 저는 1년 전 이 집에 들어와 한바탕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겨울을 무사히 보내고 새 계절을 맞아 옷장 구석에 넣어 두었던 봄철 옷을 꺼낸 순간, 멀쩡히 보관되어 있을 거라 옷이 전부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엔 이미 겨울이 지난 시기였기에 옷장에 결로가 생긴다는 것은 모른 채, 단지 옷장 속에 습기가 많다고만 생각하여 습기제거제를 넣어두었습니다. 계절이 지나며 점점 습기제거제 통에 물이 차오르는 걸 보고, 과연 이 물이 다 옷장 속 습기였군 생각했었지요.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올 겨울이 돌아왔습니다. 습기제거제도 새로 갈아 두었으니,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정신없는 12월을 보내고 1월의 어느 초순, 옷장 속에서 외투를 꺼내다 저는 또다시 옷을 뒤덮은 곰팡이를 마주했습니다. ‘또 그런다고?’하며 분노한 마음으로 옷을 다 꺼내어 안을 살펴보니, 벽장 내부에 물이 흥건했습니다.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다 못해 줄줄 흐르고 있었지요. 이 옷장은 벽에 고정된 채 마감된 구조라, 위치를 옮기거나 벽 사이에 틈을 둘 수 없는데요. 겨울엔 실내외 온도 차로 인해 고스란히 옷장 벽에 결로가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옷장 안의 물기를 닦고 난 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습니다. 이사할 때마다 컵과 그릇을 싸기 위해 보관해 두었던 뽁뽁이를 전부 꺼내, 옷장 벽면에 붙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벽과 뽁뽁이 사이엔 비록 습기가 차더라도, 그 물기가 옷에 직접 닿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지요. 그렇게 한바탕 옷장 속에 머리를 처박고 사투를 벌였던 게 불과 2주 전입니다.


하지만 어젯밤, 또다시 벽면에 맞닿은 외투와 셔츠의 소매 부분이 또 젖어 있는 걸 보았습니다. 뽁뽁이 바깥으로도 물기가 맺히는 것이었습니다. 옷장에 걸린 옷들을 다 버려버리고 싶다는 심정이 들만큼 스트레스가 차올랐어요. 또 한 번 거하게 옷장 벽면을 닦고 잔뜩 습기를 머금은 옷들을 전부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옷장을 확인해 물기를 다시 닦고 하룻밤 정도 옷을 바깥에 꺼내두자는 새로운 '옷장 관리 루틴’을 세웠습니다. 이런 수고로운 루틴을 세운 것은, 여기까지 했는데도 이러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반쯤은 체념, 반쯤은 포용하는 마음으로 “그래, 결점도 사랑하며 이 집을 품어야지”라는 생각으로, 이런 수고로움을 아예 이 집에서 더욱 슬기로운 겨울나기를 위한 의식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하는 의식이 아닌, 이 집에서 생활하기로 결정한 저만의 특별한(?) 의식인 셈이지요.


생각해 보면, 옛 조상들은 겨울마다 월동준비에 힘을 쓰며 살아왔습니다. 눈과 찬바람을 나기 위해 매년 집 곳곳을 수리하고 정비해 왔지요. 뭐, 조상까지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도 많은 자취생들이 자신의 방을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갖가지 창의적으로 수고로운 규칙을 들입니다. 가령 제 친구 Y는 유독 화장실에 습기가 차는데 불 켜는 스위치와 환풍구 스위치가 하나라, 욕실의 불을 아예 켜 둔 채 생활하곤 했습니다. 잠잘 때 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은 감내할 수밖에 없었지요. 친구 E는 사방이 뚫린 고층 오피스텔에 통창으로 불어닥치는 겨울의 찬기를 견뎌낼 방도가 없어, 창문 전체에 뽁뽁이를 붙인 채 겨울을 났던 적이 있습니다.


생활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타협하거나 감내해야 하는 부분들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만의 루틴과 규칙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일 말입니다. 물론 이런 걱정이 필요 없을 만큼 쾌적한 집에 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럴 수 있다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겠지요. 어쨌든 지금의 형편에서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집을 찾았고, 당분간 잘 지내보기로 결정했다면 이 집의 견딜 수 없는 단점에 넌더리를 내며 도망치거나 회피하는 대신 너그럽게 품고 그것을 한결 쾌적하고 창의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들을 고민해 보고 시도해 가는 것도 좋은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나만의 방법을 찾아가며 이 집을 길들이는 과정에서 살림의 기술도 능숙해지고 한층 의미 있는 생활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겠지요.


해를 거듭하며 저는 이 집에 대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이 집에서의 일상도 그에 맞게 더더욱 나답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매 계절을 지나며 장점은 더욱 즐기고, 단점은 고민을 거듭해 보완해 가면서 집과 교감하는 방법을 배워갑니다. 오늘 오후에는 단열 벽지와 곰팡이 제거제를 사러 나가야겠어요. 모두의 겨울도 수고롭게, 안녕하세요!


벽장 안에 뽁뽁이가 가득합니다. 보이시나요?



<오늘의 기본> 2023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은 늘 중요합니다. 나다운 중심을 지키는 오늘의 질서가 되어 줍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느꼈던 소소한 깨달음과 교훈, 생활의 규칙과 태도 등 삶을 더욱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라이프마인드(Lifemind)'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작가 마쓰우라 야타로 씨가 일상에서 느꼈던 생활의 힌트들을 틈틈이 기록한 <생활의 수첩>에서 영감을 받아 연재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 함께 나다운 기본을 찾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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