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조각들
푸드에세이를 쓰다 보니 자꾸 한 사람이 떠오른다. 우리 할아버지다.
슈퍼하나 없던 시골에서 살던 내게 할아버지는 읍내에 다녀오면서 항상 맛있는 걸 사 오던 사람이었다.
특히 통닭이 막 생겨날 때였는데, 종종 그걸 튀겨오셨다. 노란 종이에 쌓인 튀겨진 닭. 당시만 해도 닭발까지 모두 튀겨주셨는데 어찌나 맛있었던지.
그러고 보면 우리 가족은 닭을 좋아했던 것 같다. 백숙도 자주 해 먹었지만 제사 때는 늘 닭 한 마리와 삶은 계란을 한가득 제기에 올렸다.
우리 집은 마을 어귀에 있었는데 버스를 타려면 늘 우리 집 앞으로 와야 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도 유명한 멋쟁이답게 집에도 신경을 쓰셨는데 수석과 분재는 물론 작은 연못과 분수도 만들었다. 가축들도 몇 마리 키우셨는데 그중에는 공작새도 있었다. 특히 읍내 학교에 다니던 언니 오빠들이 버스를 기다리며 공작이 꼬리를 펼치기를 기대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또 버스 타는 곳 옆에 큰 머루나무를 심어두셨는데, 언니 오빠들이 많이 따먹거나 주워 먹었는데 늘 입이 까매져있었다.
우리 집은 정미소였다. 손녀였던 나는 말하자면 쌀수저였다.
집 바로 옆에 있던 정미소는 공장처럼 컸는데 컨베이어 벨트와 쇠덩이들이 가득했고, 큰 저울계와 먼지들도 기억난다. 벽돌이 아닌 철 같은 걸로 된 시설인데 한쪽에 구멍이 난 건지, 잘 맞춰지지 않아 틈이난건지 그곳으로 해 한줄기가 늘 들어왔다. 위험해서 자주는 못 들어갔지만, 아직도 그곳의 기름냄새와 쌀겨 냄새가 코끝에 남아 있다.
할아버지는 약주도 좋아했는데 늘 손주자랑 하는 걸 즐기셨다고 한다.
집 마당에는 나 시집갈 때 가구를 만들어주겠노라고 심은 오동나무가 있었고,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심은 밤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그 나무 외에도 부엌을 현대식으로 개량하기 전 수돗가에는 포도나무가 있었다. 이걸 할아버지가 천막처럼 만들어 햇빛을 피할 수 있게 해 줬다. 오래된 나무라 포도는 시큼하고 맛이 없었다. 어린 내게는 별로 반갑지 않은 나무였다.
내가 좋아했던 건 집 잎구에 있던 앵두나무다. 색이 고와서 좋아했다.
그 앵두들은 열매도 늘 많이 맺어 할아버지는 앵두술을 담곤 했다. 그러면 앵두빛으로 물드는 그 술이 어린아이의 눈에는 그렇게나 고왔다.
그 담금주는 안방의 벽장에 있었다.
따로 방이 없이 안방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던 내게 벽장은, 아지트이자 보물창고였다.
벽을 반으로 나눠 아래쪽엔 텔레비젼을 뒀고, 위쪽은 벽장으로 사용했는데, 아이인 내가 폴짝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다.
드르륵 창호지로 된 벽장문을 열면 명절쯤에는 엄마가 부친 전이 식어가고 있었고, 고모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드시라고 사온 박하사탕과 캐러멜캔디, 동생과 내가 명절에 받은 선물과자가 가득 찼다.
가끔은 그 벽장에 들어가 창문을 열고 할아버지가 심은 오동나무 뒤로 지는 해를 바라봤다.
또 깜깜해지면 불빛이 귀한 시골에 들어오는 헤드라이트 빛을 보며 누가 오는 걸까 상상도 하곤 했다.
우리 집에는 자랑용 공작뿐 아니라 닭, 돼지, 개도 있었다. 공작은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다른 가축들은 뒷마당에서 따로 키웠는데,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닭장에 들어가 계란을 꺼내오셨다.
엄마가 막 지은 밥에 할아버지가 꺼내온 계란을 깨서 올린다. 그 후 뜨거운 밥으로 그 계란을 파묻고 조금 후 간장과 참기름을 뿌려 먹으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조금도 비리지 않은 계란은 그때 할아버지가 준 계란뿐이다.
물론 할아버지가 늘 인자하고 좋은 건 아니었다.
키우던 닭을 잡아 삶아주신 날, 할아버지가 너무 잔인하고 무서워 보였다.
그럼에도 할아버지 곁에 머물고 싶던 나는 닭을 해체하시는 걸 봤다.
닭모래집엔 모래가 없다는 소소한 이야기도 들었던 기억이다.
"할아버지, 닭 안에 밤이 들어있어"
라는 나의 말에 할아버지는 계란이 되다만 알이라는 진실을 말해주셨다.
어린 마음에 충격이었고, 닭이 불쌍해서 울었던 것 같은데 그 계란은 그날 내 입속으로 들어갔다.
참 맛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위선자였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서울여자였던 우리 엄마는 우리들의 교육을 핑계로 드디어 시골을 탈출할 수 있었다.
물론 방학과 동시에 또 시골을 들어가야 했고 개학이 되어야 다시 도시로 나갈 수 있었다.
우리 집은 정미소를 했기에 쌀농사는 짓지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손주들 먹이겠다며 수박농사를 늘 지으셨다.
왜 수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박 밭 외각엔 늘 옥수수도 심으셨다.
방학에 할아버지와 함께 민화투를 치고 나서 먹었던 수박은 항상 달았다.
늘 모든 것에 흰 설탕을 한 숟가락씩 뿌려준 할머니 덕에 더 달았던 기억일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날렵한 외형에 멋쟁이였는데, 할머니는 투박한 외형에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게다가 할머니가 요리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어서 할아버지가 가끔 화를 내시기도 했다.
방학이 끝나고 도시로 나올 때면 할아버지는 내가 좋아하는 계란을 늘 지푸라기에 엮어 주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세상 힙한 포장인데, 어려서는 할아버지는 짚신도 신지 않는데 어떻게 지푸라기를 꼬는 거지?라는 물음만 가득했다.
할아버지 덕인지 나는 여전히 계란 요리를 좋아한다.
계란프라이보다는 계란이 많이 들어가는 계란찜, 계란말이를 더 좋아하는 건 할아버지가 준 넉넉한 계란 덕에 생긴 풍족함일까?
다만, 할아버지 계란보다 맛있는 계란이 없어 요즘엔 날달걀밥은 해 먹을 수 없다.
나 시집갈 때 직접 오동나무로 가구를 짜주겠다던 할아버지는 떠나고, 오래전 폐가가 된 시골집 뒤로 오동나무와 밤나무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할아버지가 주던 달걀 한 알이 문득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