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기나무를 본 날

암 환자 아내의 시점

by 복덕


남편은 아침마다 전화를 한다. 사랑이를 산책시켰느냐는 안부다. 여름에는 일어나자마자 산책을 나갔지만, 겨울이 문 앞에서 도사리고 있는데 어찌 일찍 산책을 나갈 수 있을까. 자연히 햇살이 퍼져야 그 기운을 얻어 슬 나가 보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계절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일 같은 말로 독촉에 가까운 전화를 해댄다. “추워도 조금만 다녀오면 개도, 사람도 좋아져.” 그의 말은 들을 때마다 잔소리 같으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섞여 있는 듯해 묘하게 마음을 흔든다. 그래도 산책 강요는 강요다. 나도 내 컨디션이 있고, 내 리듬이 있는데, 그는 그걸 잊어버린 사람처럼 매일 아침 같은 노래를 틀어댄다.


그래서 오늘은 아예 단단히 무장을 했다. 모자에 목도리에 구스 패딩까지, 마치 큰일을 치르러 가는 사람처럼 따뜻하게 껴입었다. 사랑이는 옆에서 내가 옷을 챙겨 입는 모습을 보고 신이 나 꼬리를 흔들었다. 마치 “와, 오늘은 일찍 나가네.” 하고 말하는 것 같아 괜히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오늘은 한번 나가 보자. 당신이 그렇게도 걱정하는 그 산책, 실컷 한번 해보자. 못할 이유는 없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밖으로 나왔다.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매일 가는 공원의 끝부분에는 마을 장터가 있다. 식육점도 있다. 처음 이사 와서 도대체 장은 어디서 보나하고 마트만 찾아다니다가 공원 산책길에 발견한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항상 사랑이와 같이 와서 장터 앞 작은 나무에 사랑이를 매어 놓고 장을 보곤 하였다. 옆의 식육점은 사랑이를 안고 고기를 살 수 있어서 좋아하는 가게다. 오늘은 마음먹고 산책길에 나섰는데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장터 건너편은 버스 다니는 신작로가 있다. 오늘은 신작로를 지나서 공원이 연결된 쪽으로 건너갔다. 천천히 주위 풍경을 보면서 걸으니 공원의 나무 이름을 적어 놓은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노랗게 물든 이파리가 사랑표 모양의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박태기나무”라고 쓰여 있었다. 박태기나무, 박태기나무. 아! 뭐지, 나는 자꾸 박태기나무를 읊조리고 있었다. 입안에서 그 이름을 굴려 보니 어디서 들어본 듯도 하고, 처음 보는 듯도 했다. 별것 아닌 이름 하나가 자꾸 마음을 붙잡아, 혼잣말처럼 그 이름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름만으로도 은근히 정이 가는 나무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공원을 따라 걷다 보니 방향 감각이 흐려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헷갈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사랑이 목줄을 잡아당기듯, 귀퉁이마다 비슷하게 생긴 풍경이 나를 살짝 불안하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아파트 숲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인데, 막상 그 순간에는 긴장과 웃음이 반씩 섞여 나왔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아파트 외벽의 숫자를 확인했다. 8단지를 훌쩍 지나쳤고, 5단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 여기쯤에서 헤맨 거구나.’ 스스로 중얼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이 멀어진 것은 아닌데도 발걸음이 바빠지는 건, 어쩌면 나도 아직 세상에 서툰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숲길에 들어서자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며 울긋불긋한 단풍을 더욱 빛내 주었다. 마침 손에 든 휴대폰으로 그 풍경을 한 장 찍었다. 노란 박태기나무 잎과 단풍잎, 그리고 6단지를 지나고 있었다. 눈에 익은 학교가 나타났다.


아! 드디어 길을 찾았다. 항상 학교 앞을 지나다녔으니까 이 뒷길로 가면 우리 집 가는 공원이 나오겠구나 싶으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학교 부근 신작로 갓길에는 과일을 파는 노점이 있었다. 길을 찾는 와중에도 혹시 배가 있나 살폈지만 사과만 파는 모양이다. 이상하게도 없다고 하니 더 먹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우리 집으로 가는 공원길을 찾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씨여서 한결 좋았다. 한 시간가량을 헤매다 매일 산책하던 황톳길 공원에 닿으니, 오래 알고 지낸 친구를 만난 듯 마음이 포근해졌다.

낯설었던 길은 어느새 익숙한 길 앞에서 조용히 끝이 났다. 어쩌면 오늘 한바탕 헤맨 것도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평소 그냥 지나치던 나무들도 다시 보게 되었고, 먹고 싶지만 끝내 사지 못한 배처럼, 마음속에 작은 바람 하나쯤 남겨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 박태기나무. 생각이 났다. 한 해 늦은 봄날, 친구와 수변 공원을 거닐다 가지마다 온통 꽃으로 둘러싸인 나무를 보았다. 동네에서는 흔하지 않은 나무였다. 이름표도 없어서 궁금해하는데 친구가 박태기나무라고 아는 체를 했다. 그리고는 이름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 동네는 박태기나무가 많이 있었다. 기다려지는 봄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길을 잃어보아야 비로소 내가 걷던 길의 편안함을 다시 알게 된다. 오늘의 단풍도, 햇빛도, 공원의 흙냄새도 모두 그런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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