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살아온 동네를 떠나 옆 동네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파트 생활이 편리하다며 주변에서 다들 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택에서 익숙해진 생활의 편리함도 있었으니 적응에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단지 안을 둘러보니 헬스장이 있어 반가웠다. 언젠가 운동을 시작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무엇보다 13층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과 바다, 도시의 풍경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탁 트인 세상에서 들 살고 있었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사를 원하지 않았던 남편은 시위하듯 아침마다 강아지와 비워둔 집으로 내려간다. 목욕은 꼭 거기서 하고 온다. 이사 온 지 서너 달이 지나도 그러고 있다. 날씨가 쌀쌀해질 무렵 빈집이라고 한전에서 전기를 끊었다. 그제야 빈집에 내려가기를 그만두었다. 그 집은 욕실이 좀 넓은 편인데 아파트가 욕실이 좁다고 트집을 잡는다. 사람도 크지 않은 이가 욕실 타령이다. 어쨌든 지금부터 아파트 생활을 즐겨 보리라.
그 해는 그렇게 흘러가고 2022년 새해부터 아들 손에 이끌려 헬스장에 입문했다. 안 그런 것 같아도 낮 가림이 좀 있는 내가 혼자 헬스장을 간다는 것은 마음과는 달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아들이 기본 운동을 가르쳐 주어서 어색함을 덜 수 있었다. 한 달 정도 후부터는 남편이 오기 시작했다. 남편은 하루도 빠짐없이 헬스장을 찾는다. 아침 시간에 오는 사람들끼리 친해지고 아파트 생활이 점점 재미있다. 이사 와서 처음 알게 된 사람들이라 더 정이 간다. 일이 없는 날은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면서 여유를 부려 본다. 며칠 안 보면 궁금하고 안부 물어지는 그런 사이, 속마음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부인들끼리 모이면 어김없이 시댁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친구는 며느리가 넷인 집의 셋째 며느리라는데, 동서들의 시집살이가 워낙 심해 지금은 웬만해서는 잘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제일 큰 동서는 문안 인사를 하지 않는다며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곤 했다니, 참 별일도 다 있다. 동서에게까지 문안을 드려야 한단 말인가.
한 번은 생일이라고 좋은 술을 사 들고 갔더니, 다음부터는 오지 말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남편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고 늘 형수 편만 들었다. 그저 “내 할 도리만 잘하면 되지” 하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내 이야기를 물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시댁에서 그런 일이 있으면 남편하고 같이 욕해요.” 시누이나 동서 중 편한 사람이 있었던가. 얼마나 모질게 굴었던지, 그것을 참고 버티다 보니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오죽했으면, 늘 남의 편이던 남편이 이제는 내 편이 되어 시댁 이야기를 두고 험담까지 함께 하겠는가.
남편하고 몇 년을 사귀다가 결혼을 했다. 그때는 손 한번 잡고 다니면 다 결혼을 해야 하는 줄 아는 순진한 시절이었다. 결혼해서도 직장을 나가고 아이를 낳고도 직장을 그만두지 않으니까 시샘을 하는 시댁 식구들이 있었다.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시댁 식구들. 딸이 태어났을 때는 시어머니께서 키워 주시겠다고 직장을 계속 다니라고 하셨다. 좋은 직장 다니는 며느리 봤다고 자랑도 하고 다니셨다. 마침 남편도 회사를 그만두고 그때부터 과일 가게에 입문하게 되었다. 시어머니께서도 애를 보면서 아들 가게도 봐주셨다. 시누이들은 쌍심지를 켜고 호시탐탐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기들 엄마 고생시킨다고 어디 꼬투리라도 잡혀봐라 하면서. 남편은 거래처를 넓혀 나가고 시어머니는 애도 잘 키워 주시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시어머니도 나에게는 호의적이시고 무서운 시누이들도 나는 돈 버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나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동서 형님은 모진 시집살이를 사셨다. 그 시집살이가 계속 진행 중이었다. 자기와 대접이 다른 나를 못마땅해하셨고. 날 보고 살랑살랑 회사만 다닌다고 아니꼽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내가 잘해야 집안이 편안할 거라고 알아듣지 못할 말도 하셨다. 온갖 집안 행사에 나를 대동하고 다녔다. 나는 절 모르고 시주하는 식으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기를 반복했다.
둘째가 났을 때 어머니께서는
“큰 애야, 니 하고 나 하고 둘이서 쟈들 좀 살 거로 애를 우리가 좀 봐주자”
하셨다. 동서형님은
“ 어멀, 나는 안 할라요”
뒷날에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다. 한 날은 동서 형님이 시누이들한테 이간질을 시켰다. 아마 둘째 보는 걸로 그랬을 것이다. 퇴근하고 가게에 애를 데리러 갔는데 둘째 시누이가 다짜고짜 내 머리채를 잡았다. 손아래 시누이지만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얼결에 나도 시누이 머리채를 잡았다. 어설프게 있다가는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손가락에 머리카락을 돌돌 감고 꽉 잡고 있었다. 놓치면 죽는다는 각오로.
갑자기 정전이 된 아케이드 한 복판에서 우리는 한 판 붙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버티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시누이는 고함을 치고 발악을 하였다. 남의 머리채 잡아 뜯기만 하다가 지금 같이 뜯겨 보는 것이다. 나를 아케이드 한복판에다 뇌동댕이쳐 보려고 했겠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버티고 있었다.
“ 놔라. 놔라”
발악을 했다.
“ 니가 먼저 놔라 ”
젊은 시절 33살 때에 그렇게 맞짱을 뜨기도 했다. 누구의 편도 들지 못했던 남편은 나를 돕기 위해서 정전을 시켰다면서 으쓱해했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도 안 되는 젊은 날의 소동이었다.
그 후 직장을 그만뒀다. 가까이서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사니까 별일이 다 일어났다. 항상 저희 형제 편만 들던 남편은 세월이 그때보다 두 배로 흐른 지금에야 내 편이 되어서 나를 위로하고 있다. 그래도 회사 그만둔 덕분에 우리 애들 반듯하게 잘 크지 않았냐면서. 시댁 형제들 욕도 같이 하는 사이기도 하다. 험담이라고 하면 너무 약한 것 같아서 욕이라고 표현해 본다. 그러면 조금 후련해 질려나 싶어서. 스쳐가는 기억 속에 이런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은 아직도 내 마음에 회복되지 않은 응어리가 남았다는 뜻일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렇게 케케묵은 얘기들을 아파트 헬스장에서 만난 이웃과 스스럼없이 하고 있다. 동병상련의 마음이랄까. 또 새로운 내 편이 생기고 있는 순간이다.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그런 내 편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