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앞 둘레길을 따라 김치찌개 맛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던 길이었다. 하천가에 사람들이 모여 고개를 내밀고 있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발걸음을 멈췄다.
갓 태어난 듯한 아기 오리들이 엄마 오리를 따라 줄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아이 주먹만 한 노란 털 뭉치들이 엉덩이를 씰룩이며 물 위를 잘도 나아간다. 엄마 오리는 맨 앞에서 길잡이처럼 우아하게 물살을 가른다. 마치 작은 도로 위에서 행진하는 듯 질서 정연했다.
점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오리들의 물놀이 수업은 끝나 있었다. 넓은 돌 위에서 아기 오리 열두 마리가 한데 모여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단 한 마리의 낙오도 없이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온 엄마 오리의 능숙한 ‘운전 솜씨’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그 순간, 지갑 속에만 잠들어 있는 내 운전면허증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큰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쯤 되었을 때 운전학원을 다녔다. 자동차를 살 계획도 없으면서 왜 그토록 면허증을 따려했는지, 아마 운전면허증을 따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강사에게 마른 김을 챙겨다 주며 배우기도 했고, I 자 코스시험장에서는 벽을 들이박기도 했다. 장거리 시험에서는 남의 신호등을 보며 실격의 아픔도 경험했다. 이렇게 한두 번 떨어져 가며 어렵게 면허를 땄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 면허증은 30년 가까이 지갑 속에서 ‘존재만 하는 물건’으로 남아 있다.
IMF 때 같이 보석감정사 공부를 하던 언니가 차가 세 대나 있어 한 대를 주겠다 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운전면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남편이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차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내 끈질긴 설득 끝에 남편이 며칠 만에 면허증을 땄다. 하지만 그 또한 운전대를 잡아본 적은 없다. 그 길로 남편도 운전대를 한 번도 잡지 않았다. 운전을 할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남편은 직장 다닐 때도 그랬다. 전라남도 진도까지 출장을 갈 때도 기차 타고 버스 타고 굽이굽이 느긋하게 다녔던 것 같다. 성격은 급해서 참을 줄을 모르는 사람인데 자가용 운전 DNA가 없는 모양이다. 장사를 해도 자가용 운전이 필요치 않았다. 오토바이로 납품을 하고 산지나 도매상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는 물건 구입한 곳에서 트럭으로 물건을 다 실어 주었다. 때문에 구태여 본인이 운전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남편을 보고 도매상인들은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편하게 특이하게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항상 남편 옆에는 오토바이가 있다. 어느 비 오는 날 오토바이에 짐을 산더미 같이 싣고 가는 모습을 본 지인들은 걱정을 했다. 나는 항상 말했다. 제발 지상 2미터 이상 짐 싣지 말라고. 제발 법규대로 하라고. 오토바이 교통법규에 그런 법규가 있다. 하도 짐을 높이 싣고 다녀서 내가 알게 된 법규다. 어쩌다 보는 사람도 걱정하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고 겪는 나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그런 걱정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편과 오토바이는 언제나 한 몸처럼 움직였다.
지갑 속 운전면허증이 가끔 빛을 발할 때가 있다. 신분을 요구받을 때 주민등록증 대신 꺼내면, 운전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작은 뿌듯함이 있다. 자가용 없는 인생을 염려하던 이들도 어느새 말을 거두었다. 인생은 각자의 방식대로 달리는 법이니까. 여전히 지갑 속에는 운전면허증이 있다.
오늘 본 엄마 오리의 행렬이 자꾸 떠오른다. 한 줄로 나아가던 그 작은 생명들을 끝까지 지켜낸 엄마 오리처럼, 나도 내 삶을 조심스레 몰고 가고 있다. 비 오는 날 오리들이 비를 피하듯, 나 역시 나만의 방법으로 인생을 ‘운전’ 해 나가는 중이다.
가끔은 길을 잘못 들어 돌아가기도 하고, 예기치 않은 비바람에 잠시 멈춰 서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나의 여정이다. 누가 옆에서 신호를 주지 않아도, 내 안의 나침반이 방향을 알려준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마음의 핸들을 꼭 잡고, 조심스럽게 내 삶의 도로를 달린다.
지갑 속 운전면허증은 단순한 증명이 아니다. 그것은 나도 내 삶의 운전자가 될 수 있다는, 작지만 단단한 믿음의 표식이라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