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균이 인권과 재강을 KO 시킨 후 관장의 빠른 주선에 의해 얼마 안 가 나균의 데뷔 전이 치러졌다. 나균은 데뷔 전부터 이어지는 경기들을 계속해서 1라운드 KO로 장식하며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어떤 선수도 나균을 그라운드 기술까지 끌고 가지 못했다. 매 경기를 호쾌한 펀치로 상대를 KO시키며 나균의 경기는 1라운드를 넘기지 않았다. 그 결과 격투기 팬들은 나균에게 환호했고 그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나균의 얼굴과 이름은 계속해서 뉴스와 잡지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나균도 경기마다 1라운드에서 끝내긴 했지만 나름의 페이스 조절을 했다. 더 빨리 끝낼 수도 있었지만 몇 대 맞기도 하고 피해 다니기도 하며 시합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나균은 시합의 쇼 비즈니스적인 면을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경기 중 어쩌다 안면이나 몸통에 펀치나 킥을 허용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타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 정도면 얼마든지 더 맞아도 될 것 같았다. 몇 대를 맞아주면 상대가 기세등등해져 달려들었다. 그때 카운터펀치를 먹이며 경기를 끝내곤 했다. 어쨌든 나균은 1라운드는 넘기지 않았다. 1라운드 이상 뛰기에는 시합이 너무 지루했다. 1라운드 안에 시합을 결정짓는 것은 나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격투기 팬들은 열광했다.
‘1라운드의 사나이 김나균’
나균이 아시아 UFC 페더급 챔피언이 된 후에 각종 방송에서도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침마당 같은 프로에서 부르더니 이제는 각종 예능 프로그램이나 버라이어티쇼에서도 부르기 시작했다. 나균은 평생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의 관심에 취해 성심껏 방송 출연 요구에 응했다.
최근 나균이 관심을 가지는 걸그룹으로 ‘엘프스’가 있었다. 말 그대로 요정 같은 다섯 소녀로 이루어진 그룹인데 그는 센터를 맡고 있는 혜수의 열렬한 팬이었다. 혜수는 투명한 피부에 큰 눈망울을 가진 미소녀이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엘프스 멤버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나균은 혜수를 볼 때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방송에서 실제로 그녀를 보게 되었다. 예능 프로에서 요즘 화제인 엘프스와 ‘1라운드의 사나이’ 나균을 같이 부른 것이다. 방송 시청률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었다.
더구나 나균은 또 하나의 기쁨으로 설레고 있었다. ‘엘프스’를 좋아하긴 하지만 나균은 원래 록매니아였다. 그가 숭배하는 그룹인 ‘페이탈실버’의 리더 빈스도 오늘 방송에 초대되어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기뻐 소리를 질렀다. 빈스의 얼굴 화장은 흡혈귀를 연상케 하는 짙은 아이라인과 창백한 피부로 표현되는데 180cm가 넘는 장신의 빈스가 무대에서 울부짖을 때는 정말 한 명의 흡혈귀의 절규를 보는 듯했다. 나균은 페이탈실버의 라이브 공연에 여러 번 갔었지만 실제로 빈스를 무대 밖에서 만나본 적은 없었다.
나균은 흥분해서 전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빈스 형님을 방송 출연자로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빈스 형도 나를 알까? 요즘 방송에서 얼굴을 자주 비추었으니 혹시 아실지도 몰라. 방안 벽에 붙은 빈스 형의 포스터가 자신을 자랑스럽게 보고 있는 듯했다.
드디어 스튜디오에 들어가기 전 대기실에서 나균은 혜수와 빈스를 동시에 처음 만나게 되었다. 먼저 빈스에게 다가가서 열렬한 팬이라고 말하며 사인을 받았다. 빈스는 예상보다 사석에서 너무 예의 바르게 대해주며 사인을 해주었다. 그리고 빈스 역시 나균의 팬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아 형님 이렇게 친절할 수가.. 무대에서는 카리스마 넘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시면 너무나 다정하시구나. 그런데 정말 내 경기를 보신 걸까?’
그리고 혜수에게 다가가 사인을 받는다.
“안녕하세요. 팬이에요.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약간 쑥스러운 듯 말을 건네는 나균을 혜수는 잠시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얼굴에 다소 냉기가 돌았다.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나요?”
그녀는 이내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예의 상냥한 웃는 얼굴로 돌아간다. 방송을 녹화하며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 와중에도 나균은 빈스와 혜수를 번갈아 바라보며 방송 출연자라기보다는 한 명의 팬으로서 황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덧 방송 녹화가 끝나고 아쉬움과 함께 스튜디오를 떠나려는 순간 혜수가 나균에게 다가와 쪽지 하나를 건넸다.
“제 전화번호에요. 조금 있다 주차장에서 봐요.”
“아.. 네 알았어요.”
얼떨결에 전화번호를 받은 나균은 가슴이 방망이질하는 것을 느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꿈이면 깨지 않기를..'
잠시 후 나균은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지하 주차장 입구를 지나니 그녀를 찾으려 그리 노력할 필요도, 전화를 할 필요도 없었다. 혜수는 자신만큼이나 우아한 하얀 스포츠카 앞에서 나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혜수는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묻는다.
“사람을 죽인 적이 있나요?”
잠시 전기 충격을 맞은 듯 나균은 할 말을 잊은 채 인형 같은 혜수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건 뭐지?’
“아니 없어요. 왜 그런 걸 묻죠?”
“우리 자리를 옮겨서 계속 얘기하죠."
혜수와의 대화는 갑자기 생각만큼 매력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천사 같은 얼굴로 저런 말을 태연히 하다니.’
그런데 갑자기 십여 명의 팬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쏟아져 나오며 나균과 혜수에게로 다가왔다.
“언니, 너무너무 사랑해요. 사인해 줄 수 있나요?”
극성팬인 듯 보이는 여학생이 말했다. 모두들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데 공부하느라 바쁘지는 않은가 보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을 지하 주차장까지 따라와 조그만 증표라도 받기 위해 애원하고 있었다. 혜수는 사인을 해주려 매고 있는 핸드백 안에 펜이 있는지 살폈다. 그 순간 나균의 눈에 여고생의 얼굴 일부에서 어두운 녹색의 우둘투둘한 살결이 드러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여고생은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혜수에게 날렸다. 순간 나균이 여고생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학생의 발차기가 나균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순간 나균의 몸이 공중으로 들리더니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UFC 아시아 챔피언을 발차기 한 방으로 5미터 정도를 날려버렸다.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가떨어진 나균은 혜수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재빨리 몸을 일으켜 혜수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미 혜수의 손에는 긴 칼이 들려있었다. 마치 중세의 기사들이 쓰는 육중한 검처럼 보이는데 혜수의 가냘픈 몸에는 어울리지 않는 위압감을 뽐내고 있었다.
‘저 검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나균은 아버지가 늑대로 변한 장면을 목격한 이래로 현실에서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두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정말 믿기 힘든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혜수는 달려드는 팬을 가장한 적들에게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검을 휘둘러 공격하고 있었다. 마치 춤을 추듯 육중한 검을 휘두르며 한꺼번에 달려드는 정체 모를 적들을 상대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어느새 검을 들고 있었고 힘을 합쳐 혜수를 공격하였다. 공격해오는 적들 중 일부의 얼굴에 녹색 피부가 군데군데 드러났다.
혜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공격을 하느라 더 이상 그 점에 신경을 쓸 수는 없었다. 그 무리 중 한 명은 쓰러졌다가 일어나는 나균을 향해 짐승처럼 네 발로 뛰어오며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칼날 같은 긴 손톱이 바람을 가르고 나균의 목을 노렸다. 가까스로 몸을 뒤틀어 피한 나균은 어느새 킥을 상대의 얼굴에 날렸다. 얼굴에 킥을 맞고 무너지는 상대의 복부에 정권을 꽂아 넣고 혜수 쪽을 향해 바라봤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혜수의 손끝에서 장검이 춤을 추며 적들을 하나씩 쓰러뜨리고 있었다.
‘젠장, 나보다 훨씬 강하네.’
자신의 손에 쓰러진 적을 내려다보니 아까까지는 분명 사람이었는데 이제 보니 몸은 사람인데 얼굴은 마치 도마뱀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갑자기 또 한 무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수십 명의 정체 모를 적들이 또다시 지하 주차장 입구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들 중 일부는 짧은 창을 들고 있었는데 이전 놈들보다 훨씬 날렵하게 움직였다.
나균은 창이 없는 놈들을 상대하여 먼저 덤벼드는 몇 놈을 때려눕혔으나 금세 포위를 당해 공격받고 있었다. 특히 짧은 창을 든 적들은 마치 곡예를 하듯 무술을 하는데 움직임을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혜수도 검으로 수많은 창의 공격을 막아내기 힘겨워 보였다. 수가 너무 많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피를 충분히 마시고 오는 건데.’
갑자기 어깨가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창 하나가 나균의 어깻죽지를 찢고 들어온 것이다. 발차기로 상대를 밀어내며 간신히 두 번째 치명타를 피한 나균은 퇴로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적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갑작스레 피로감이 몰려왔다. 적들을 뚫고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혜수는 허공에서 하나의 긴 빗자루 모양의 물체를 꺼냈다. 매끈한 빗자루 모양의 물체는 반투명해서 그 모양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빗자루에 올라타더니 나균을 보고 외쳤다.
“빨리 타.”
나균이 빗자루에 같이 올라타자 빗자루는 빠른 속도로 지하 주차장 출구를 향해 나르기 시작했다.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혜수는 장검으로 헤치며 앞으로 쏜살같이 내달았다. 속도가 워낙 빨라 뒤따라오는 괴한들을 순식간에 따돌렸다.
‘휴, 이제 안심이군.’
그러나 착각이었다. 지하 주차장 입구는 또 다른 적들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수십 명은 족히 되어 보여 그대로 뚫고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들 대다수는 검을 들고 있었다.
나균은 이제는 막다른 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