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균이 수많은 적들을 보고 절망감에 빠져있을 때 어디선가 빈스가 홀연히 나타났다. 긴 머리를 날리며 빈스는 나균과 혜수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빈스는 셔츠를 찢었다.
그러자 수많은 문신이 드러나는데 주로 무기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빈스는 팔을 뒤로 뻗쳐서 등에 세로로 길게 수놓아져 있는 장검의 문신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뽑아내는 순간 문신은 실제의 검으로 바뀌었다. 빈스는 나균과 혜수를 향해 다시 한번 미소를 던지고 검을 꼬나들고 적들을 베어 나가기 시작했다.
빈스의 힘은 강력했다. 호리호리한 장신의 록커는 무대를 휘젓듯 괴한들 사이를 누비며 순식간에 길을 만들어냈다. 그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적들은 녹색 피를 쏟으며 쓰러져 갔다. 그리고 빈스는 나균과 혜수에게 빨리 빠져나가라고 소리쳤다. 나균과 혜수는 빈스가 만들어 준 길을 따라 쇄도했다. 그리고 어느새 주차장을 빠져나와 하늘로 솟아올랐다.
잠시 후 그들은 푸른 한강 위를 날고 있었다.
'빈스 형님의 문신이 실제 무기로 변할 줄이야. 그런데 형님 그냥 록커가 아니었나?"
나균이 혜수와 나는 빗자루를 타고 빠져나오는 그 짧은 찰나에도 나균은 빈스의 화려한 검술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전사의 모습이었다. 오늘은 놀라운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나 나균은 어안이 벙벙했다. 더구나 장검을 휘두르고 이렇게 하늘을 나는 아이돌 가수라니..
혜수에게 물어볼 것이 산더미 같았으나 지금 이 환상적인 순간을 깨고 싶진 않았다. 지금 나균은 혜수의 허리를 잡고 같이 하늘을 날고 있다.
조금 전 정체 모를 괴한들과의 치열한 싸움이 지금은 마치 한낮의 백일몽같이 느껴졌다. 끔찍했던 백일몽은 어느새 아름다운 꿈으로 변해 있었다. 잠시 이 순간을 음미하기 위해 나균은 눈을 감았다. 혜수의 머릿결에서 나는 향기로운 냄새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감미로웠다.
그때 혜수는 뒤돌아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빈스는 강하니까. 좀 있다 제 집으로 올 거예요. 제가 메시지를 지금 남겼어요.”
혜수가 빈스와 이미 아는 사이였나 보다.
‘빈스 형은 걱정이 별로 안 돼요. 정말 강했어요. 그보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요’
나균은 격렬한 전투 후에 하늘을 날며 맛보는 잠깐 동안의 휴식에 취해 있었다. 궁금한 것들은 혜수의 집에서 휴식을 좀 취하고 나서 물어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시내는 아름다웠다. 지상으로 내려가면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 속에 매일 사투를 벌이는 삶들을 펼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세계는 말이 없이 평화로울 뿐이었다. 나균은 세상에 특이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자기뿐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두 사람이 자신처럼 특이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점은 무척 기뻤다. 더 이상 외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정말 끝내주는 날이야.’
한강 저 너머로 붉은 저녁놀이 찬란한 빛을 뿜으며 서울 시내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혜수의 집은 한강 변에 위치한 고층 아파트의 고급 펜트하우스였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경치는 한 폭의 풍경화 같았고 집 안은 좋은 향기가 가득했다. 나균이 입은 어깨의 상처는 어느새 아물어 있었다. 흡혈귀는 놀라운 치유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나균은 혼자서 창밖으로 한강 야경을 바라보며 한숨 돌리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서 박쥐 한 마리가 퍼덕이며 날아들었다. 박쥐는 사람 형상으로 변하며 혜수의 집으로 들어왔는데 빈스였다.
‘사람이 박쥐로 변하다니 기가 막히는구먼. 오늘은 뭐 하나 현실감 있는 게 없어.’
“형 괜찮아요?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응 괜찮아. 나도 가까스로 빠져나왔어.”
“그런데 이런 걸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형은 어떻게 박쥐로 변할 수 있죠? 몸에서 칼을 뽑아낸 건 어떻게 된 거예요? 형 공연에서 몸에 있는 무기 형상의 문신을 본 적은 있지만 그게 실제 무기로 변할 수 있을지는 상상도 못 했어요.”
"너는 너 자신이 무엇인지도 아직 모르는구나. 너와 나는 같은 종족이야. 우리는 흔히 뱀파이어라고 불리지."
나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벌리고 그냥 빈스를 쳐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빈스는 미소 띤 얼굴로 나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균이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하고 물어보았다.
"그럼 우리는 흡혈귀 같은 건가요? 그래서 제가 사람의 피를 마시면 그렇게 힘이 샘솟았던 건가요?"
“야 표현이 그게 뭐냐? ‘노스페라투’나 ‘뱀파이어’ 같은 우아한 이름도 있는데. 어떤 지역에서는 ‘스트리고이’라고도 불리지. 하여튼 우리가 귀신도 아니고 흡혈귀는 좀 삼가 줘."
“그렇죠. 흡혈귀는 어감이 좀 그러네요.”
"그런데, 뱀파이어는 햇볕 아래서 재가 되지 않나요? 그리고 십자가를 무서워하고 그런 것 아니었나요?"
"우리 종족의 역사는 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몰라. 오랜 역사 동안 인간들 중에 우리의 정체를 목격한 사람들이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전설이나 소설을 만들어내었기 때문에 맞지 않는 정보도 많지."
"저도 뱀파이어가 나오는 영화를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르겠어요."
"십자가나 마늘을 생각해낸 사람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하지만 별 영향은 없어. 너도 이젠 알겠지만 우리는 햇빛도 좋아하고 밤에 잠도 자지. 다만 머리가 잘리거나 심장이 뚫리면 죽어.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모습으로 영생을 누릴 수도 있어. 사람의 피는 우리에게 힘을 주지. 피가 없다고 죽진 않지만 몹시 쇠약해지게 돼. 그리고 늑대나 박쥐로 변신할 수도 있지."
"그러면 어린아이 때 피를 마시고 뱀파이어가 되면 평생 어린아이 모습으로 살게 되나요?"
"꼭 그렇진 않아. 뱀파이어는 자신이 원하는 나이 때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어. 어린아이가 갑자기 어른이 될 순 없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점 성장할 수 있고 젊은이가 되었을 때 신체의 노화를 멈출 수 있지. 그러나 혈액 공급을 너무 오래 중단하면 멈추었던 노화가 급속히 진행될 수 있어."
"형 몸의 문신이 정말 무기가 될 줄은 몰랐어요."
"응 내 몸의 문신은 유사시에 쓸 수 있는 무기들을 형태를 바꾼 에너지로 몸에 그려놓은 거야."
"저도 그렇게 할 수 있나요?"
"네가 에너지를 다루는 훈련을 열심히 한다면 가능하지."
“그럼 형이나 나처럼 뱀파이어인 사람은 얼마나 되나요?”
“나도 몰라. 뱀파이어의 공동체는 별로 견고하지 않아. 서로 대부분 독립적으로 살고 있는 경우가 많아. 하지만 개인적 친분이 있는 뱀파이어 사이에는 연락을 하고 지내기도 해. 나도 몇 명 알고 있지. 널 아까 녹화장에서 봤을 때 뱀파이어인 줄 직감했는데 그 자리에서 아는 척하기는 어려워서 적당한 기회를 보고 있었어. 가까이 대면하면 뱀파이어인지 아닌지 느낄 수 있어. 그렇지 않고서는 파악이 어려워.”
“형 콘서트에도 엄청 자주 갔어요.”
“많은 인간들 사이에서 우리 종족을 파악하는 능력 따윈 없어. 관중 속에서 미인을 발견하는 능력이 더 탁월하지.”
“혜수는 어디 갔어?”
“샤워 중이에요.”
“혜수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꽤 질긴 악연을 가지고 있지.”
“어떤 악연이 있나요?”
“악연이라니요, 빈스!”
어느새 샤워를 마치고 나온 혜수는 빈스를 나무랐다.
“혜수 씨, 정체가 뭐예요?"
나균이 물었다.
혜수는 살짝 매혹적인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나는 수많은 전설이나 민담에서 ‘마녀’라고 묘사되어 온 종족의 일원이에요. 전설이나 민담도 우리에 대해 왜곡된 사실을 많이 퍼뜨리지만 소설이나 영화는 심각하죠. 우리를 너무 엉터리로 묘사해서 이제 그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는 건 의미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우리는 스스로를 '가디언즈'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얘기할 때는 마녀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금방 이해할 수 있으니. 다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녀처럼 악당이라기보다 사람들을 위협적인 초자연적 존재들로부터 보호하는 집단이에요.
우리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다는 것과 우리의 치유 능력이나 무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마법을 부리는 걸로 본다면 그 정도까지가 우리에 대해 진실일 겁니다.”
“사람에게 주술을 걸거나 흑마술을 하는 거 아니었나요?"
“그럼 당신은 어때요? 예쁜 아가씨 홀려서 피를 빨고 노예로 만들어야 하지 않나요?”
“저는 그러기에는 너무 착한 청년이에요. 피도 몰래 혈액 팩을 사서 충당해요. 아가씨 피를 빨기는커녕 아직도 모기에 피 빨리고 있어요.”
“사람 죽여본 적 없는 것 맞죠?”
혜수의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