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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는 마음 Jun 21. 2022

잊혀진 자들의 전쟁 - 3. 깨어남 2



다음 날 일어난 나균은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온몸에 강력한 활력이 넘쳤다. 이런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등굣길에는 기분이 다소 황홀해져서 가는 내내 바보처럼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늘 보던 풍경은 갑자기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뭔가 세상이 멋진 곳으로 탈바꿈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해졌다.



주위의 나뭇잎과 꽃들이 평소보다 싱그러웠다. 나뭇잎파리 하나에 주의를 집중하니 식물 속에 흐르는 수액의 미세한 움직임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또한 귀를 기울이면 지나가는 다른 학생들의 기운찬 심장 박동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고도로 섬세해진 오감은 세상을 남김없이 느낄 수 있게 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고 신선한 세계인지 그전에는 왜 미처 알 수 없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나균에게 이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계로 변모해 있었다.



학교에서도 나균의 마음은 수업 시간 내내 다른 세계를 부유하고 있었다. 꿈을 꾸는 듯한 상태에서 다른 시대의 다른 기억이 마음속에 떠오르다 사라지곤 했다. 이것들은 자신의 전생의 기억인 것 같기도 했고 다른 누군가의 기억 속을 나균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새 수업이 끝났다.



하굣길에 어김없이 정재 일당이 나균이 집으로 가는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저 멀리서 정재 일당이 나균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나균은 평소처럼 숨이 막히기는커녕 갑자기 코웃음이 났다. 그들이 나균에게는 너무 왜소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작은 양 떼가 옹기종기 모여 자신을 마중하는 듯했다.



“돈은 마련했니? 아니면 오늘도 몸으로 때울까?”



정재가 여유 있는 표정의 나균을 노려보며 공격적인 어조로 물었다. 그 말이 너무나 가소롭게 느껴져 나균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뜻밖의 반응에 정재 일당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혁재가 여느 때처럼 나균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기습이라고 하기에는 나균의 눈에 보이는 혁재의 주먹은 너무나 느렸다. 마치 공기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안간힘을 쓰며 간신히 나아가는 듯했다. 나균은 혁재의 주먹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잡았다. 그러나 정재 일당의 눈에는 나균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럽게도 혁재의 주먹이 갑자기 나균의 오른손에 잡혀 있는 것이었다. 나균이 조금 힘을 주니 우두둑 소리와 함께 혁재의 주먹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혁재가 비명을 질렀다. 정재와 또 한 명의 부하인 경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잠시 망설이더니 그래도 남자의 자존심을 끌어모아 나균에게 달려들었다.



무모하게 달려드는 둘을 나균은 양손으로 한 명씩 뺨을 갈겼다. 나무둥치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둘 다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졌다. 나균이 기절한 둘을 내려다보고 있자 혁재는 벌써 저만큼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있었다.



허무했다. 이렇게 약한 녀석들에게 그동안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당하고 살았다는 것이 너무나 의아하게 느껴졌다. 이들에게 보복하고 싶은 마음도 어느새 사라졌다. 사자가 어떻게 양 떼를 상대로 복수하겠는가? 정재는 불쌍하게도 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기절한 녀석들을 보며 통쾌함보다는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설마 죽지는 않겠지? 그래도 힘 조절은 했는데. 본능적으로 나균은 알 수 있었다. 온 힘을 다하여 정재와 경구를 때렸더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걸.



나균은 원래 착한 청년이었다.



며칠간 나균은 궁리했다.



‘이렇게 강한 몸을 가지고 어떻게 돈을 벌지?’



복수를 하고 나니 숨어 있던 자본주의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형식 아저씨가 아버지가 남기신 이탈리아 식당을 잘 운영해 주시고 수익금도 보내주고 계시지만 나균도 그냥 허송세월하고 싶진 않았다. 학교도 그만둘 계획인데 뭐라도 하며 돈을 벌고 싶었다.



나균은 특별히 성적이 좋지도 않고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어떤 사람에게도 뒤지지 않는 능력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한계를 알 수 없는 나균의 몸이었다. 어떻게 이런 몸을 가지게 되었는지 원리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말씀하신 기회를 가지게 된 것만은 틀림없다. 다름 사람의 피가 자신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준 것만은 확실하다.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서 지루했던 인생을 바꿔 보고 싶었다.



‘몸이라면 운동 분야인데.’



최근에 인터넷 신문에서 읽은 MMA(종합 격투기) 스타인 코너 맥그리거가 한 해 2000억 원이 넘는 돈을 벌어들였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바로 이거다. 야수의 몸을 가지고 격투기 선수들과 맞붙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다.’



이 정도의 신체 능력이라면 격투기에서 필요한 많은 경험과 훈련 없이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프로선수들의 오랜 경험과 치열한 훈련을 압도적인 힘으로 능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었다. 분명 지금 나균이 가진 신체 능력은 일반적인 사람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균의 마음에선 이상하리만치 강한 자신감이 용솟음쳤다.



더구나 다크 웹에서 만난 혈액 공급자 K도 송금을 해주는 즉시 혈액을 무난히 공급해 주었다. 앞으로도 그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피가 떨어질 일만 없다면 앞으로도 힘을 유지하는 데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으리라.



물론 그렇다고 나균이 혈액만을 마시고 살게 된 것은 아니다. 나균은 여전히 밥 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피를 공급해 주지 않으면 몸이 몹시 쇠약해지거나 적어도 이 초인적인 힘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K가 있는 한 혈액 공급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날로 나균은 학교를 가지 않고 MMA 체육관으로 향했다. 결국 가능성을 시험해 보려면 호랑이굴로 쳐들어갈 수밖에 없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꽤 규모가 큰 MMA 체육관을 찾자마자 한걸음에 달려갔다. 체육관에 나균이 들어서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땀 냄새가 물씬 나는 체육관 안은 짐승 같은 투기를 뿜어내는 근육질의 남자들로 가득했다. 선수인지 훈련생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샌드백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는 타격 음은 체육관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그라운드 기술을 연습하는 선수들도 있었고 스파링을 하고 있는 선수들도 있었다. 그들은 마치 고대의 전사처럼 아름답기까지 한 고도로 단련된 근육질의 몸으로 자신만의 전쟁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균은 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균이 감격하여 체육관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체육관 관장으로 보이는 험상궂은 아저씨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억지로 띠며 나균에게 다가왔다. 평소에 쓰지 않던 안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등록하러 왔어요?”



나균은 다른 MMA 훈련생들에 비해 비교적 왜소한 체격이었다. 체육관에는 물론 경량급 선수들도 있었지만 주로 웰터급 이상의 선수가 주축을 이루어서 보통 키가 180cm를 넘었다. 나균은 키도 170을 조금 넘는 정도니 체육관에선 빈약한 체격에 속했다. 그나마 피를 마시고 나서 나균의 몸은 마른 근육질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체육관의 덩치들에 비해서는 볼품없는 쪽에 가깝다. 그러나 나균의 눈에는 180에서 190센티미터의 거구들이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왠지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다. 나균에게 그들은 덩치는 거대하지만 유순한 초식공룡처럼 느껴졌다.



나균은 등록을 마치고 관장이 시키는 대로 줄넘기를 하다가 갑작스레 관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시범적으로 스파링 한 번만 해보면 안 될까요, 관장님?”



관장은 손사래를 친다.



“첫날부터 그렇게 말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용기는 높이 산다만 크게 다칠 수도 있어. 좀 더 훈련하고 나중에 생각해 보자.”



나균은 며칠 더 기다려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첫날부터 내뱉은 나균의 이러한 당돌한 발언이 몇몇 훈련하던 선수들의 심기를 거슬렀다. 체육관은 아시아 UFC 웰터급 챔피언 배재강을 배출한 종합 격투기계의 명문이었다. 이런 체육관에 와서 첫날부터 스파링 운운한 나균을 못마땅한 눈길로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임인권이라는 190cm 거구의 선수이다. 그는 말라비틀어진 애송이의 시건방진 발언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다.



그 이후로 나균은 체육관을 열심히 다녔다. 그러나 벼르고 있던 인권은 나균을 불러 온갖 잔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다. 때로는 나균의 빈약한 몸을 보고 약골이라고 놀렸다. 어떤 때는 어설픈 나균의 자세를 보고 '요즘은 개나 소나 다 MMA를 하는구나'라며 나균을 모욕했다. 



나균은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좁은 체육관에서 달리 그를 피할 수도 없었다. 한번 대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저런 거구의 선수와 맞붙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나친 자신감은 착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착각은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다. 나균은 좀 더 신중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인권은 샌드백을 두드리고 있는 나균을 불렀다.



“나균, 너 첫날부터 스파링을 해보고 싶다고 했지? 내가 한 수 가르쳐 줄 테니 헤드기어 쓰고 링 위로 올라와.”



인권은 애송이에게 한 수 가르쳐 주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는 벼르고 벼르다가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날뛰는 하룻강아지에게 이번에 제대로 분수를 가르쳐 주고 싶었다. 이제 체육관에 온 지 한 달 밖에 안된 나균의 스파링에 관원들의 흥미진진한 시선이 모아졌다. 체급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이 스파링은 구경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균이 과연 몇 초 동안 버틸 수 있을지가 관전의 포인트였다. 모두들 통쾌한 대참사를 기대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훈련하던 선수들은 잠시 훈련을 멈추고 둘의 스파링을 쳐다보고 있었다. 인권은 헤드기어 없이 링 위에 올랐다. 나균이 링 위에 오르고 스파링이 시작되었다.



공이 울리자마자 인권은 거대한 주먹을 날리며 달려들었다. 나균은 몸을 약간 숙여서 인권의 펀치를 얼굴 옆으로 흘렸다. 나균의 눈에는 그다지 빠르지 않은 펀치였다. 오히려 너무나 느려서 기다리기 지루할 정도였다. 그리고 몸을 숙였다 살짝 일으키며 어퍼컷을 인권의 턱에 꽂았다. 인권의 머리는 크게 뒤로 젖혀졌고 링 바닥에 고목나무처럼 앞으로 쓰러지며 의식을 잃었다.



관원들은 경악했다.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경량급의 애송이가 펀치 한 방으로 헤비급의 임인권을 KO 시킨 것이다.



한참 후에 인권은 고개를 흔들며 간신히 의식을 차린다. 그리고 미안한 표정을 하고 바라보는 나균을 향해 갑자기 흠모의 눈빛을 보낸다. 태세 전환이 빠르다.



“동생 앞으로 많이 가르쳐줘. 이런 실력을 숨기고 초보자인 척 우리를 속이다니. 껄껄, 재치 있는 친구인걸.”



인권의 사회 처세술은 이미 달인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나균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관장은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때 체육관에 막 도착해서 몸을 풀며 이 모습을 바라보던 UFC 웰터급 아시아 챔피언인 배재강이 갑자기 헤드기어를 쓰며 링 위로 올라왔다.



“나균, 나와도 한 라운드만 가볍게 뛰어볼까?”



아시아 챔피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균은 위축되기는커녕 '물론입니다'라며 흔쾌히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관장은 웬일인지 말리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재강의 움직임은 확실히 인권의 것과는 달랐다. 표범 같은 날렵한 움직임으로 사정거리 안에 들어와 펀치를 날리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충분히 경계하며 외곽으로 돌다 어느새 다시 치고 들어왔다. 날카로운 펀치와 킥이 연거푸 날아들었다. 하지만 나균은 어렵지 않게 모두 막거나 피했다. 그리고 나균의 오른 주먹이 재강의 턱에 꽂혔다.



재강은 다운이 돼서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불같이 화를 낼 것 같았던 관장은 처음엔 다소 놀란 듯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관장은 체육관 간판스타의 몰락에서 엄청난 기회를 보고 있었다.



‘우리 체육관에 보물이 들어왔구나. 세계를 제패할 수도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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