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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찾는 마음 Jun 19. 2022

잊혀진 자들의 전쟁 - 2. 깨어남

평소에도 학교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나균은 조용히 학교를 다니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냈다. 나균의 아버지가 실종되었다는 소식도 나균의 존재감만큼이나 학우들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 소식은 물 위에 작게 일었다 사라지는 잔잔한 파문처럼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급속히 사라져 갔다. 나균에겐 어차피 상관없었다. 학교를 곧 그만둘 생각이었으니까.



학교에는 나균을 괴롭히는 정재를 필두로 하는 불량배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무 때나 나균의 돈을 뜯어 갔다. 그리고 자신들의 심사가 뒤틀리면 가끔 학교의 화장실로 나균을 끌고 가서 샌드백처럼 구타하며 자신들의 뒤틀린 불만과 분노를 해소했다. 약자를 괴롭히며 희열을 얻는 인간은 어디에나 있다.



나균은 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노리개 중 한 명이었다. 정재 일당이 보일 때마다 나균은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까 기대를 할 때마다 여지없이 기대는 깨어지고 그들의 괴롭힘이 시작되곤 했다.



나균에겐 학교는 지옥이었다. 그는 단지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괴롭힘을 주위에 알리고도 싶었지만 보복이 두려웠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아는 것은 더 두려웠다. 이제 아버지가 사라진 마당에 더 이상 고통을 연장할 이유는 없다.



레스토랑 경영은 아버지 밑에서 식당 매니저를 하시던 형식 아저씨가 맡아주었다. 평소에도 나균을 아껴주고 자신이 맡은 일에 성실한 분이라 의지가 되었다. 아버지가 실종되었다고 하니 나균을 옆에서 가장 위로하고 격려해 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형이라고 생각하고 의지하라며 나균에게 따뜻한 가슴을 내어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에 나균은 하루하루를 의지 없는 로봇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균은 배가 고파서 집 근처의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서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편의점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어귀에서 정재와 그 일당 두 명이 나균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망가려 해도 눈이 마주친 순간 이미 달아나기에는 늦었다. 나균은 숨이 막히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는 사자 앞에 바들바들 떠는 작은 영양 한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나균을 끌고 으쓱한 골목 안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정재는 비열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너희 아버지 집 나가셨다며? 이제 너 돈 좀 있겠네. 너희 아버지가 남겨 놓고 간 돈이 많을 거 아냐? 내가 급히 500만 원이 필요한데 말이야. 네가 친구의 우정으로 도와주면 좋겠는데.”



“미안해, 아직 내가 돈이 없어. 나도 지금 생활비와 용돈을 형식이 아저씨에게 타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재의 부하들 중 하나인 혁재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눈에 별이 번쩍이며 입안에 달큰한 피 맛이 느껴졌다. 정재 일당은 함께 달려들어 나균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얼마나 맞았을까. 몸을 가누기 어려운 나균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정재는 한 마디를 던졌다.



“네 사정은 내가 굳이 알 필요는 없고. 돈 마련할 때까지 이건 매일 반복될 거야. 그것만 알아둬. 돈이 없으면 친구의 화풀이라도 도와줘야지. 요즘 내가 화가 좀 많아서 말이야. 빨리 준비할수록 네가 덜 고통스러울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봐.”



정재의 얼굴에 또 한 번 비열한 미소가 번졌다. 약자를 마음껏 유린한 뒤의 잔인한 만족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정재 일당은 골목에 피범벅이 된 나균을 남겨두고 유유히 떠나갔다.



나균은 쓰러진 채 처절하게 울었다. 상처가 고통스러워서가 아니었다. 상대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의 눈물이었다. 거기에다 억울하고 원통한데도 작은 반항조차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는 한층 더 컸다.



‘짐승 같은 놈들. 친구 아버지가 실종되었다는데 돈을 뺏겠다고 이렇게 두드려 패다니. 이것들이 사람인가. 하기야 나를 친구로 여기지도 않겠지. 자기들의 노리개로 밖에 생각하지 않을 거야.’



나균은 흘린 피가 얼굴에 엉겨 붙은 채 무거운 몸을 이끌며 겨우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분하고 참담했다. 비참하고 외로운 마음에 죽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냥 죽어버리면 편할까? 어차피 이제 혼자고, 사는 것도 하루하루가 너무 힘든데..



그러나 죽으려고 해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옥상으로 올라가서 뛰어내리려고 밑을 내려다 본 적이 있다. 그 당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나균이 선뜻 행동을 옮기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지금도 모멸감과 절망감에 죽고 싶지만 나균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아버지의 말씀이 뇌리에 스쳐갔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 때 기회가 있다. 강력한 힘.. 인간의 피를 마셔라.’



그 기회가 도대체 무얼까? 그런데 인간의 피를 마시라니. 그걸 어떻게 마셔?

하지만 강력한 힘을 얻는다니 그건 무슨 의미일까? 어떤 힘을 의미하는 거지?



나균은 생각할수록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나균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앞으로 돈을 구할 때까지 정재 일당에게 괴롭힘을 당할 생각을 하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혹시나 강력한 힘을 얻는다면 정재 일당에게 갚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 힘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균은 갑자기 의욕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에 대한 분노가 나균을 행동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피를 마시다는 건 끔찍했지만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치러야 할 대가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피를 먼저 구해야 하는데 어떻게 구하지? 우선 생각나는 건 수혈할 때 쓰는 혈액 팩 밖에 없었다. 인간의 피를 구하자고 다른 사람을 해할 수 있을 정도로 나균은 악한 인간은 아니었다.  병원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혈액 팩을 구할 수 있을까?



나균은 혈액 팩을 구하는 법을 인터넷에서 검색하기 시작했다. 개인이 합법적으로 혈액 팩을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나균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학교를 마치면 집에 쳐박혀 외톨이 생활을 했던 나균은 컴퓨터를 다루는 데 능숙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다크 웹에 접속해서 혈액을 어렵게 구할 수 있었다. 



공급자는 자신이 병원 관계자인데 어떤 사정으로 돈이 필요하다고 했고 돈만 주면 언제든 필요한 혈액을 공급해 주겠다고 했다. 인터넷에서는 돈만 날리게 만드는 사기가 즐비했지만 나균은 한시가 급했다. 나균이 사기당할 것을 각오하고서 돈을 보내자 그는 친절히 혈액을 아이스박스에 담아 택배로 보내주었다.



며칠 동안 학교에 가지 않고 나균은 택배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혈액 팩이 아이스박스에 담겨 도착한 날 나균은 택배 상자를 뜯고 바로 혈액 팩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아이스팩 사이에 담긴 검붉은 색의 혈액 팩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관문의 열쇠처럼 보였다. 희망이 떠오른 것도 잠시, 이 혈액을 마시고 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하지만 나균의 복수심이 두려움을 짓눌렀다. 나균은 혈액 팩을 조금 데운 뒤 더 이상 망설임 없이 눈을 감고 비닐 팩에 든 혈액을 그대로 들이키기 시작했다. 매캐한 비린내가 처음 느껴졌지만 차츰 피는 생각보다 더 달짝지근한 맛이 돌았다. 그리고 어지러움을 느낀 나균은 침대에 쓰러졌다.



천장이 뱅뱅 돌기 시작했다. 잠시 후 온몸이 타는듯한 열기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곧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도는 것이 느껴졌다.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고 방 안이 갑자기 쪼그라든 것처럼 보였다. ‘크악’ 비명을 지르며 나균은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온몸의 근육 하나하나가 터질 듯한 압력을 받으며 나균은 마침내 자신의 몸이 폭팔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정적이 찾아오며 그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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