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고요하게 해주는 만트라(주문)

by 찾는 마음
meditation-1287207_1920.jpg 출처 : Benjamin Balazs from Pixabay



나는 매일 아침 루틴으로 명상을 하는데 가끔 잡념 때문에 집중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외는 주문 같은 가르침이 있다. 이 가르침은 불교의 경전이나 여러 종교, 그리고 라마나 마하리시 같은 스승들의 가르침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가르침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하고 나면 마음이 쉽게 고요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 몸이 아니다, 나는 내 생각이 아니다,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다, 나는 내 성취가 아니다, 나는 내 평판이 아니다, 나는 내 기억의 합이 아니다, 나는 내 이름이 아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이다.



우리의 인생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믿고 있다. 진정한 나를 찾으려면 나의 본질이 아닌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진정한 본질만 남는 것이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 내 몸이 나라고 생각한다. 우리 몸의 세포는 매일 새로 생성되고 죽어간다. 우리 몸 전체 세포의 평균 순환 주기는 약 80일이라고 알려져 있다(질량 기준으로는 1년 반이라고 한다). 즉 80일이 경과하면 평균적으로는 몸 안에 똑같은 세포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우리 뇌 안의 신경세포인 뉴런은 교체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뇌세포를 제외하고 우리의 몸은 평균적으로 80일이 지났을 때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몸이다.



하지만 교체되는 체세포는 나름의 규칙과 관성으로 같은 형태의 몸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의 몸은 항상 변하고 있고 세포 단위로 보았을 때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고 있어서 변함없는 '나'라고 하기 어렵다.



neurons-7079536_1920.jpg 뉴런 출처 : Lakshmiraman Oza from Pixabay



그렇다면 교체되지 않는 뉴런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뉴런은 우리가 쌓은 경험을 통해 기억을 형성하고 이 기억들의 합이 '나'라는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래서 보통 '나'라는 건 기억들의 합이라고 정의하면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기억은 변함없는 실체가 아니다. 기억은 특정한 사건에 자기 나름의 주관적 판단과 감정이 결합되어 있다.



컵에 물이 반이 차 있을 때 어떤 사람은 반밖에 없다고 해서 짜증 나고 불행한 기억을 만들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나 차 있어 감사하고 다행한 기억을 만들 수 있다. 자기가 하던 사업이 잘 안 되어 접게 되더라도 어떤 사람은 '나는 너무 운이 나빠. 사업가의 자질도 없는가 봐. 다시는 사업을 안 해야지'라며 좌절과 절망의 기억을 만들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힘들었지만 좋은 경험이었어. 이번은 실패했지만 이번 사업의 실패에서 배운 교훈으로 다음번에는 멋지게 성공해야지. 나는 성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라며 배움과 용기의 기억을 만들 수 있다.



누가 옳은가? 옳은 것은 없다. 각자의 주관적인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기억도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똑같은 사건을 겪은 두 사람이 서로 같은 사건을 완전히 다르게 기억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저절로 생겼다 저절로 사라진다. 어떤 생각은 터무니가 없어 실소가 나오기도 하고 어떤 생각은 남이 알까 두려울 때도 있다. 이 생각들도 실체가 없다. 내가 붙들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왔다가 가는 손님들일뿐이다. 특히 부정적인 생각에 매달려 실체가 없는 허깨비에 너무 힘을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좋은 생각들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다. 그 생각들로 세상을 아름답고 살기 좋게 만들 수 있다. 생각은 도구이지 우리 본질이 아니다.



감정이 나인가? 감정도 내 안에서 올라오는 것이긴 하지만 역시 생각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손님이다. 내가 그 감정을 붙들지 않는 한 감정도 힘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감정을 계속 느끼고 싶어 집착하고 매달리다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었을 때 그 뿌듯함이 너무 좋아 항상 남의 인정을 갈구한다. 남의 인정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남의 눈치를 보고 그들에 마음에 들기 위해 무리하고 자신과 남을 속이기도 한다.



반대로 증오나 질투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집착하여 한평생을 고통받기도 한다. 증오가 뿌리 깊은 경우 심지어 그 상대가 죽고 이 세상에 없는데도 용서가 안 되어 고통받는다. 상대가 이미 사라진 뒤의 증오는 허깨비가 아닌가? 상대가 살아 있다 해도 상대가 나의 증오를 모르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나 혼자 가시를 품고 스스로 가시에 찔려 혼자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감정에 집착하면 감정을 주체할 수 없고, 순간이면 사라지는 감정이 우리 주인이 되어버린다.



성취가 나인가? 내 성취는 자랑스러운 나를 만들어주지만 역시나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어떤 사람은 나의 성취를 성취로 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나의 성취를 실패에 가깝다고 여긴다. 나의 뿌듯한 성취도 같은 분야의 훨씬 더 거대한 성취 앞에 초라해진다.



또한 그 성취가 실패로 변했을 때 자랑스러웠던 성취는 더 큰 고통의 원인이 된다. 그렇다면 성취는 나의 자산일 수도 족쇄일 수도 있다. 역시 성취의 실체는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변하니 고정된 실체가 없다.




평판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자신들의 기준에서 마음대로 정한다. 그들이 나의 진정한 모습을 모르고서도 마음대로 만드는 것이다. 나에 대한 평판을 만드는 타인들이 진정한 내 모습에 관심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타인들은 때로는 내가 보여주는 모습을 토대로 평판을 만든다. 그 모습이 가식적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평판도 실체가 없다. 물론 살아가는 데 평판은 중요하지만 항상 변하고 손에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이름은 내가 아니다. 이름을 바꾼다고 내가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은 내가 아니다. 일을 바꾼다고 내가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diamond-316610_1280.jpg 출처 : PublicDomainPictures from Pixabay



앞서 언급한 모든 것들이 내가 되어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항상 변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래서 각종 종교의 경전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를 찾으라는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본질이고 실체다. 그래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진리라 부른다. 불경 중에 변하지 않는 진리를 논한 금강경을 영어로 'diamond sutra'라고 부른다. 이 이름도 진리가 다이아몬드처럼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는 속성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변하지 않고 영원한 본래의 나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볼 때 앞서 언급한 수많은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바람처럼 왔다가 가는 것이다. 이것들을 긍정적이고 참된 방향으로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집착하지는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나를 찾지 못하고 길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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