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이나 종교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서 고려 시대까지 불교가 지배적인 사상이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가 사회의 기준이 되는 사상이었다. 서양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이 오랫동안 개인의 가치관 혼란에서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리고 로마제국 시대 이래로 중세 시대로 이어지며 기독교가 지배적인 사상이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기독교의 권위가 타격을 받으며 어느 정도 지위를 잃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과학과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사상이 대신하여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국가에서 이슬람교나 힌두교 등 각 종교가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을 이루고 있지만 역시 조금씩 과학과 민주주의나 자본주의에 영향력을 잠식당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에는 사회의 제도를 이루는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등의 기본적 이데올로기를 제외하면 개인들이 따르는 지배적인 사상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게 됐다.
어떤 지배적인 사상이 있을 때 좋은 점은 사회가 그 사상으로 인해 통합되고 개인들은 사상적으로 방황을 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 사상을 따라서 안전하게 살면 된다. 하지만 나쁜 점은 그 사상에 반하는 생각을 표출하면 탄압을 받게 되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그래서 사상의 발전이 어렵고 사회는 정체된다.
또한 지배층에 의해 지배적인 사상이 대중을 착취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고 사회는 부패한다. 예를 들면 중세 시대에 부패한 교황청이 개인의 죄를 사해준다는 면죄부를 팔았던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하느님이 죄를 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면죄부라는 종이 조각만 사면 개인의 죄가 저절로 사해진다는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대중의 부를 착취하기 위해 교황청은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판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는 바야흐로 사상의 자유 시대이다. 지나치게 병적이거나 국가 전복을 꾀하는 극단적인 사상이 아니라면 누구나 마음대로 자신의 거의 모든 사상을 표출할 수 있으며 지배적인 사상의 권위는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상의 표현이 이루어졌고 우리는 그 속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상을 선택하여 행복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할 터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우리가 고루하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불교나 기독교 또는 유교가 지배하던 세상보다 행복한 세상이 되었는가? 물질적인 부분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이 훨씬 행복해졌다. 과거 역사 어느 시대보다 사람들은 부유해지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물질적 기준으로 보면 중세 시대의 왕족이나 귀족보다 현대의 중산층이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있다.
예를 들면 식사 시간에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소수의 부유한 귀족이나 왕족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악사들을 고용하는 데 많은 돈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간편하게 거실에 스테레오를 구비해놓고 언제든 여러 시대의 다양한 음악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다. 음악뿐만 아니라 TV를 통해 어떤 악단이나 극단도 클릭 한 번으로 거실로 오롯이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중세 시대의 유럽의 귀족이나 왕족은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극소수만의 특권이었다. 알프스의 만년설을 운반해 와서 시럽을 뿌려 먹어야 하는데 얼음의 운반과 보존 과정에 엄청난 돈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은 집 앞을 나가 10분 정도만 걸어도 편의점에서 간편하게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 있다.
먼 곳으로의 여행은 어떤가? 과거에 해외여행은 엄청난 자산가가 아니면 꿈도 꾸기 힘들었다. 하지만 현대는 마음만 먹으면 해외여행을 하는 것이 더 이상 부유층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과거에 비해 의술의 발달로 병으로 죽는 사람도 훨씬 줄어들었고 식량 생산 기술의 발달로 굶주리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핵 억지력에 의해 전쟁의 발발도 줄어들어서 전쟁으로 사망하는 사람도 매우 줄어들었다. 더구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사고나 재해로 죽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음식과 옷과 물건은 마트와 상점에서 넘쳐난다. 오로지 물질적인 관점에서는 과거 시대의 사람들이 현대인의 삶을 본다면 꿈에서나 보던 천국 같은 삶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렇게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는가? 물질적인 면에서는 인류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데 정신적인 면에서 우리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슬프게도 이 점에서는 확신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절이 좋았지라며 예전을 그리워한다. 좀 더 인생이 단순하고 소박하던 시절, 경제적으로는 덜 풍족했어도 의외로 삶은 더 행복했다.
과거에는 정보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힘들었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한 정보가 넘쳐서 어떤 정보부터 습득해야 할지 정신이 없다. 인터넷과 미디어에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개인들은 익사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나친 물질적 풍요도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물건 하나를 살 때도 너무 많은 선택권 앞에서 당황하는 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쉽게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하지만 몇 개 되지 않는 물건은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해변의 모래처럼 많고 쉽게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은 가치를 상실한다. 예를 들면 나는 어릴 때 용돈을 모아 간신히 음반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구입한 음반의 노래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했다. 지금은 노래를 MP3로 얼마 안 되는 돈에 쉽게 다운로드하거나 유튜브로 들을 수 있다 보니 노래가 그리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나친 정보의 맹폭격과 물질적 풍요 속에서 우리는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계속 사 모은다. 어떤 것은 미디어에서 나에게 필요하다고 알려줬고, 어떤 것은 남들에게 내가 이 정도로 잘났음을 과시하기 위해 사야 한다.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더 풍요로운데 마음은 더 여유가 없고 쫓긴다.
그냥 잠시 쉬고 싶어도 SNS를 열면 나보다 잘나가는 사람들, 화려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보이며 이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강박감이 찾아온다. 뭐라도 빨리해야 된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현대는 과거 역사 그 어느 때보다 자살률도 높고 우울증을 앓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물질의 풍요와 정보의 홍수, 사상의 자유 속에서 길을 잃은 면도 없지 않다. 행복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과 미디어에서는 백가쟁명 식으로 서로 자기가 맞는다고 아우성이고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지 모른다. 모두가 따르는 스승이 있다면 고민 없이 쉽게 따르련만 그런 스승은 이 사회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상의 자유가 개인들을 혼란으로 빠뜨리니 과거의 지배적인 종교와 사상의 시대로 회귀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지배적인 종교나 사상의 부작용을 우리 인류는 경험할 만큼 경험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배적인 사상이나 종교는 사람들의 새로운 사상의 발생을 억압하고 지배층의 도구로 전락하여 사회를 부패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어찌 보면 진정한 스승을 잃어버렸다. 아마 진정한 스승들이 있어도 수많은 정보와 선택지 속에서 찾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각자가 자신의 스승이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나는 우리 각자가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우리 모두 안에 신성이 내재해 있다고 믿는다. 조용히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생각지도 못한 지혜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러나 아직 자신 안에서 지혜로운 내면의 소리를 듣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마음이 충분히 고요해져야 내면의 소리가 들리는데 마음이 끊임없이 물결치고 불안하여 내면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명상을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마음이 고요해지는데 명상을 어려워하는 분들도 있다. (기도나 묵상도 일종의 명상이다)
명상하는 법을 간단히 소개하면 처음엔 10분 정도만이라도 시도해 본다. 앉아서 자기의 호흡의 들숨, 날숨에 의식을 집중한다. 당연히 잡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잡생각이 떠오르면 떠오르는 걸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에 의식을 돌린다. 처음에는 이것을 10분 동안 하면 된다. 처음엔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날뛰며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자책할 필요가 없다. 잡생각조차도 과정이다. 잡생각으로부터 호흡으로 의식을 되돌리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잡생각을 알아차리고 의식을 호흡으로 되돌리는 것까지 모든 것이 명상의 과정이니 시간을 채우면 된다. 시간을 의무적으로 채우다 보면 명상은 저절로 늘게 되어 있다. 고요의 평화를 맛보게 되면 시간은 본인이 저절로 늘리게 될 것이다. 자세는 가부좌나 반가부좌, 양반다리 등 본인이 편안한 자세로 하면 된다.
그러나 명상이 도저히 힘든 분은 우선 자기 마음이 끌리는 스승을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수많은 책과 인터넷의 정보를 통해 훌륭한 스승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맹목적인 추종은 경계해야 한다. 가짜 스승과 가짜 선지자가 판을 치는 현대이다. 제대로 구분하려면 그 스승에게서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배우지만 의문이 생긴다면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따라가야 한다. 내 경우에는 스승의 말씀을 듣거나 가르침을 따를수록 마음이 고요해지는 경우 참 스승이라고 여긴다.
한 분의 스승을 따르는 것도 좋고 여러 스승의 말씀과 책을 접하는 것도 좋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생각을 성숙시켜가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외부의 수많은 소음에 정신을 팔았고 부정적인 생각과 말초적인 자극에 마음을 오염시켜 왔다. 사회의 지배적이거나 교조적 사상이 사라진 자리를 혼란이 차지했다.
그 결과 현대는 극단적인 황금만능주의, 개인의 소외, 남녀 간의 성 대결, 정치권에 의해 조작되는 지역적 대립, 세대 간의 갈등 등이 심화되고 있다. 물질적 풍요에 비해 정신적인 빈곤은 심화되었다. 삶의 의미에 대해 친구들과 얘기해 본 적이 있는가?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눠본 마지막 때가 언제인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대화가 끝나면 공허함이 찾아오고 사는 게 별거 있나로 항상 결론이 나지 않았는가?
인생은 참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라 볼 때 참된 스승을 만나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그런 행운을 당장 누리지 못한다 해도 스승들의 가르침은 책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자신의 내면에 제대로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사실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스승이 된다. 하루하루를 무언가 배우고 깨닫고 성장해간다면 마음은 참행복으로 가득 차게 된다.
현대의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정신적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정신적 풍요의 보물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발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자신 속의 보물은 무시한 채 바깥의 보물을 찾아 방황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마치 파랑새를 찾아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도 못 찾았지만 집에 돌아오니 자기 집에 파랑새가 있었다는 동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