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하여

by 찾는 마음


왜 갑자기 이렇게 무시무시한 주제로 글을 쓰는가라고 의아해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두려워하고 꺼림칙해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두렵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대면하고 내 나름대로 그 의미를 성찰하기 위해서다. 막연히 두렵다고 피해 다니다 막상 그때가 되어서야 허둥지둥거리고 싶지 않다.



'메멘토 모리'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로마제국 시절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이 행진할 때 뒤에서 누군가가 이 구절을 외치도록 했다. 전쟁의 승리로 인한 교만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죽음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우리 삶을 더 의미 있게 살도록 만들기도 한다.



20130422054360.png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는 유명한 명화인데 아래 가운데 부분에 길쭉하게 보이는 것이 사람의 두개골이다. 그림 옆에서 질 보이도록 하는 트릭이 숨겨져 있다. '메멘토 모리'를 의미한다



스티브 잡스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오늘 하루만을 산다면, 내일 죽는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할까라고 자신에게 되물었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 알맹이만 남고 모든 실속 없는 껍데기들은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최고의 발명품'이라 칭했다. 죽음을 직면할 때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사느라 자신의 삶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과 직관이 시키는 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들만 마음에 남는다. 본질만 남는다. 우선 그것들부터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결국 죽을 운명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나 또한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내 삶을 낭비해온 시간이 많았다. 언젠가 할 거야. 상황이 되면 할 거야. 그 상황은 좀처럼 오지 않고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결코 죽음 앞에서 후회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태했었노라고. 나의 삶의 소명을 막연히 기다리다 때를 놓쳤다고.


물론 하던 일을 갑자기 그만두고 내키는 대로 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던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당장 시작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해 보일지라도. 마음속에만 있고 실행하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으니까. 이 세상은 작은 시작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반짝이는 성취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세상은 아름답지 않은가?


4a57e254637f1.jpg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으로 세상은 가득하다



죽음에 대한 대면은 차마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용기와 힘을 준다. 누군가에 대한 증오가 가슴에 사무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고통 속에 허덕이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을 때도 그 증오를 가슴에 품고 저세상으로 가고 싶은가라고 묻는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죽음 앞에서도 용서하지 못할 만한 죄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증오라는 가시를 가슴에 품고 남은 인생을 살 이유는 굳이 없다. 그 가시에 찔리는 건 상대방보다 오히려 나일 테니까.



요 몇 년 동안 비교적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이 주변에 계셨다. 놀라움과 함께 새삼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인생은 생각처럼 길지 않을 수 있다.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 내가 죽을 때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노라고 생각하며 후련히 떠나가고 싶다.



글을 쓰는 것도 언젠가 상황이 되면 시작해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루어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쓰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블로그 포스팅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며 생각이 정리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솟아났다. 글쓰기의 여정이 나를 어디로 데려 갈진 모르지만 기대가 된다.



죽음은 두렵다. 특히 사후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더욱 두려운 것이다. 미지의 것은 항상 두려움을 준다.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을 상상하는 사람도 있고, 죽고 나면 끝이고 아무것도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내 짧은 소견으로는 천국과 지옥은 비유적인 가르침이 아닐까 싶다. 자유의지를 선물해 주신 신이 선물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쓰지 않았다고 영원한 벌을 내린다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고 느낀다. 그보다는 우리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마음속에 사니, 마음을 잘 다스려 살면 천국이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마음에 짓눌리면 지옥이라는 말씀이 아닐까 한다. 살아서 천국인 마음이 죽어서도 천국 아닐까? 그렇다고 살아서 지옥인 마음이 죽어서 꼭 영원히 고통받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본인은 잘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살면서도 마음의 괴로움으로 대가를 치른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자신이 아는 세계가 우물밖에 없듯이 고통 속에 계속 있으면 자신이 아는 마음 상태는 고통밖에 없다. 그것도 벗어나고서야 고통이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어떤 책에서 보았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자신의 피해자의 마음이 되어 자신이 했던 행위에 대한 그 모든 고통을 오롯이 겪는다는 내용도 있다. 이것이 지옥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 고통을 모두 겪은 후에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 써놓고 보니 윤회설에 기반한 내용 같다.


























내가 좋아하는 책인 아니타 무르자니의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에서 아니타는 임사체험을 경험한다. 임사체험이란 신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하고 뇌파가 멈추어 의학적 사망 판정을 받은 사람들이 다시 소생하여 자신이 겪은 사후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임사체험은 전 세계 도처에 수많은 사례가 존재한다. 공통점은 보통 빛을 따라가서 사랑이 가득한 세계를 방문하는 이야기가 많다. 아니타가 경험한 사후세계 역시 무시무시한 최후의 심판이 기다리는 세계는 아니었고 한없이 따뜻하고 편안한, 사랑이 넘치는 세계였다. 또한 자유와 해방의 세계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하나인 무조건적인 사랑의 세계였고 거기에서 이미 돌아가신 가족이나 친척들이 행복한 얼굴로 맞이해주는 세계였다. 아니타는 현생으로 돌아오기 싫었으나 해야 할 사명을 깨닫고 아쉽지만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한다. 아니타는 임사체험으로 얻은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보람찬 인생을 살고 있다.



임사체험을 치료 중에 투입된 약물이나 물리적 자극에 의한 망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러한 자극에 의한 망상은 두서없이 무질서하게 단편적으로 펼쳐지는 경향이 있다. 보통 임사체험은 질서 정연하고 체험 후 깨달음으로 인해 삶에 심오한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망상과 다르다고 임사체험을 옹호하는 학자들은 주장한다. 특히 아니타는 그녀가 혼수상태일 때 병실 주변에서 의료진과 가족들이 나누었던 대화나 행동을 회복 후 생생히 증언하는 장면이 있는데 몸의 생물학적 상태와 의식의 선명함은 때로는 전혀 다르게 작동하는 듯하다. 결국 임사체험은 몸의 죽음이 의식의 죽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사람도 있는데 의식이 완전히 없는 상태를 상상할 수 있는가?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의식이고 우리는 의식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며 이 세상을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에서 상상할 수 없다는 건 본질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 있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한다.



우주가 우리의 의식의 부모이고 고향이라면(모든 것은 우주로부터 나왔기에) 우리의 의식은 우주처럼 불멸이 아닐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우주처럼 우리의 본래 의식도 영원한 것이 아닐까? 다만 그 본래 의식이 인간의 영혼에 깃들어 자아를 창조하며, 짧은 인생 동안 세상에 유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창조는 불완전한 인간의 자아가 필요한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위대한 발명품과 예술을 창조해왔다. 자유를 얻기 위해, 사랑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또 다른 개인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 위대한 사상과 물질, 예술들이 탄생했다. 자아의 결핍은 창조의 원동력이다. 그러다 육체가 죽음을 맞이하여 한 자아의 인생이 끝나면 영원불멸의 우주의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자유의지와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창조를 위한 신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한바탕 삶이란 놀이터에서 각자의 역할에 따라 놀고 나면 그 결과 세상은 더 아름다워지고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놀이가 끝나면 역할을 내려놓고 품위 있게 무대를 내려가야 한다.



어차피 삶이 끝나면 그 뒤에 뭐가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왕이면 죽음 뒤에 멋진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싶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에선 장례식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신나게 놀며 더 멋진 세상으로 떠나는 고인을 축하해 준다고 한다. 그동안 지구별에서 고생 많았다 하면서. 장례식이 하나의 축제가 된다. 나도 그들처럼 느끼고 싶다. 살아 있는 동안 아낌없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살다가 모두가 하나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저세상에서 사랑하는 그이가 묻는다.


"어땠어?"


"잘 놀았어. 후회 없이 놀았어."





이전 02화스승이 사라진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