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생 오해하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아무나 떠올려 보라. 떠올린 그 사람에 대한 나만의 오해들이 있다. 내 기준으로 그 사람을 해석한다. 내가 학력을 중시한다면 그 사람을 학력으로, 내가 외모를 중요시한다면 그 사람을 외모로, 내가 경제력을 중요시한다면 그 사람을 경제력으로 판단한다.
더 나아가 외국인이라면 그 사람의 국적도 편견의 한 요소가 된다. 우리는 내가 가진 온갖 편견을 기준으로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내 마음속에 저장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좋고 잘난 사람, 내가 싫어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나쁘고 못난 사람. 온갖 자기 기준으로 만들어 논 상대의 이미지는 실체가 있는가? 자기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진정으로 알 수 없다. 그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도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잘도 나만의 기준으로 그 사람의 동기를 추측하고 이런 사람이라고 못 박아 버린다. 오해는 오해를 낳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확증 편향(자기가 확신하는 주장의 증거만을 수집하고 반증이 나오면 외면하거나 보지 못하는 현상)으로 인해 그 사람에 대한 편견은 쌓여만 간다. 상대도 나를 그만의 편견으로 보고 있을 텐데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 진정한 상대를 만나는 날은 과연 오기나 할까? 평생을 자신의 마음에 비친 상대의 그림자만 보고 이러쿵저러쿵 오해하다가 끝나는 것이 다반사일 것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가능하기나 한 걸까?
사람뿐만이 아니라 내가 날마다 사용하고 있는 자동차와 살고 있는 집, 직장, 자주 들르는 식당이나 카페, 산책하는 공원 등 그 어느 것 하나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있을까? 모두 내 마음의 필터를 끼고 내 나름의 해석을 하며 이 세상을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보는 대로의 세상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내가 아는 전부이니까. 평생 상대를 오해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부부, 친구라 할지라도.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셨는데 내 마음에 비친 산이 실제 있는 그대로의 산인지, 내 마음에 비친 물이 실제 있는 그대로인 물인지 알기 어렵다. 아무런 편견과 판단 없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티끌 없이 깨끗하여 보는 것을 왜곡시키는 더러움이 없을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깨달은 자의 눈에 세상은 완전하다는 것도 완전한 마음으로 바라보니 세상이 완전한 것이 아닌가? 나는 내 마음의 안경에 낀 더러움은 닦지 않고 상대를 더럽다고, 이 세상을 더럽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마음에 비친 세상을 보며 온갖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은 자신의 마음의 혼탁함을 깨닫지 못한 한낱 어리석음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세상은 고요하고 내 마음도 고요해진다. 세상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 할 것이 없다. 그냥 나에게 주어진 것을 열심히 하며 내 마음을 깨끗하게 닦으며 살아가고 싶다. 내 마음이 깨끗해진 만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그럴수록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이 없어질 것이다. 결국 세상을 보고 욕해 봤자 그것이 바로 내 마음에 비친 세상일뿐이니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짖어대는 개와 다를 바 없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는 세상이 조화롭다. 어둠이 있으니 빛이 있고 못남이 있으니 잘남도 있다. 음이 있으니 양도 있고 고통이 있으니 쾌락도 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니 이런 대립과 조화가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단조롭고 재미가 없을까? 아무리 선하고 매력적인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똑같이 그런 사람만 있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어둠을 없애려고 발버둥 치지 말라. 그러면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 못남을 없애려 하지 마라. 그러면 잘남도 없다. 선악도 대부분의 경우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의 차이이다. 상대를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정신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있어 저것도 있는 이 세상이 아름답다. 모두가 서로 씨줄과 날줄로 얽혀 아름다운 이 세상을 직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