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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일 Jan 07. 2023

꽃이 좋아 시작한 사진이 꽃사랑을 이어준다.

바람난 여인 얼레지

내가 사진을 찍게 된 것은 꽃 때문이었다. 30대 중반에 한 선배교사와 우연히 학교 정원의 온실 주변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선생님. 이게 제비꽃이에요. 그런데 어떤 꽃은 잎이 둥글고, 어떤 꽃은 가늘고 길어요. 또 어떤 꽃은 보라색이고, 어떤 꽃은 흰색이에요. 자세히 보면 모두 달라요” 가늘고 긴 잎을 가진 보라색 제비꽃만 알고 있었던 나는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꽃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알고 보니 제비꽃 종류만 60가지가 넘었다.

     

이때부터 꽃에 대한 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야생화 도감을 샀다. 잡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꽃이었다. 그래서 원래의 이름을 불러주기로 했다. 도감을 들고 다니며 주변의 꽃 이름을 하나하나 알아갔다. 모든 풀에는 꽃이 피었다. 이쁘고 눈에 띄는 꽃도 있었지만, 꽃처럼 생기지 않은 꽃도 많았다. 3년 넘게, 길을 걸으면서 풀만 보고 다녔다.     


이쁜 꽃을 찾아 산에 갔고, 오래 보고 싶어서 카메라를 샀다. 카메라로 처음 찍은 꽃이 변산바람꽃이다. 2월 중순이면 어물동 마을의 뒷산은 온통 변산바람꽃이다. 이 녀석들을 찍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거나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심지어 숨조차 멈추어야 한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고 찍을 수 있다.     


지금도 꽃을 찍기 위해 산에 간다. 2월 말에는 너도바람꽃과 복수초, 3월 초에는 노루귀 때문에 간다. 10년이 넘게 3월 마지막 토요일은 천성산을 찾는다. ‘바람난 여인’이라는 꽃말을 가진 얼레지 때문이다. 치마를 살짝 들고 유혹하는 듯한 모양에서 생긴 이름이다. 상리천 계곡 주변은 분홍색 융단으로 덮인다. 수천수만 송이의 얼레지 중에 다음 조건이 맞아야 내 카메라에 담긴다.

     

첫째, 배경이 좋아야 한다. 꽃이 돋보이기 위해서는 풀이나 낙엽 같은 주변에 시선을 뺏기지 않아야 한다. 큰 나무나 바위 아래, 고목의 속 빈 공간이 그렇다. 하늘은 늘 좋은 배경이다.

둘째, 모델이 좋아야 한다. 똑같이 생긴 꽃은 없다. 키가 다르고, 색의 농담이 다르고, 잎의 위치도 다르다. 미스코리아 후보 중에서 진(眞)이 있듯이 특별히 이쁜 꽃이 있다.  

셋째, 빛을 담아야 한다. 사진은 빛의 예술이다. 그늘보다 빛에 노출될 때 이쁘다. 위에서 비추는 빛, 옆에서 비추는 빛, 뒤에서 비추는 빛. 어디서 빛을 받는냐에 따라 사진은 달라진다.

   

무심히 걷는 듯하지만 내 눈은 수천 송이의 얼레지를 모두 보고 있다. 마음에 드는 모델을 찾는 순간 심장 박동이 올라가고, 꽃과의 씨름이 시작된다. 먼저 꽃과 눈높이를 맞추어 자세를 잡는다. 치마속이라도 볼려면 머리를 땅에 파묻어야 한다. 노출과 셔터 속도를 바꾸면서 계속 찍고, LCD로 확인하기를 반복한다. 옆모습을 찍기도 하고, 뒤로 돌아가기도 한다. 자세에 따라 꽃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숨을 참느라 호흡이 가빠 한 번씩 일어나서 숨을 가다듬는다.      

이렇게 찍은 수십 장의 사진 속에서 한두 녀석만 선택되어 SNS에 올라간다. 꽃 찍으러 산에 갈 때는 산이 아니라 꽃이 목적이다. 마음에 드는 꽃과 마주할 때면 나를 잊는다. 내 마음에는 꽃만 있다. 작년에 본 얼레지와 올해 본 얼레지는 다르다. 그래서 매년 만나러 간다. 꽃이 좋아 사진을 시작했지만, 사진 때문에 그 사랑이 지속되고 있다. 사랑하면 설렌다. 아직 한 겨울이지만 내 마음은 벌써 천성산에 가 있다.


                                                                빛받은 얼레지

                                                        얼레지 치마 속 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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