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뒤풀이, 다시 처음으로
○ 마지막 뒤풀이, 다시 처음으로
『담론』의 부제는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늘그막, 막차, 막장 (···) 이울고 저물고 기우는 것들.
제 몸에 항아리를 심었습니다. 그 속에 『담론』을 넣어두고 버릇처럼 들추어보았습니다. 그런 습관이 관습이 될 때 얼굴을 하나씩 꺼내 추체험(椎體驗) 했습니다. 허리띠와 넥타이를 풀고 알몸으로 항아리 속에 들어가 아 아, 외쳤습니다. 녹음된 제 목소리듣는 것처럼 어색했습니다.
당신의 살결이 여전히 그립습니다. 어깨와 팔꿈치 사이 놓인 보드라운 레일 위를 순방향으로 세 걸음 역방향으로 한 걸음씩 옮겨봅니다. 당신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면 녹나무 한 그루가 연륜을 알 수 없는 그늘을 공작의 날개처럼 펼치고 있습니다.
결혼행진곡이 마태수난곡처럼 들렸던 그날, 아가리를 굳게 다문 수술실을 생각합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떨어질까 마음 졸였던 시간, 제가 골라준 장갑 끼고 서로 팔짱 끼고 생태하천을 걷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냉장고 속 아이스크림처럼 당신 몸에 산다는 암 덩어리도 꽁꽁 얼었으면 좋겠다고, 하얀 목련을 볼 수 없어도 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빈 그릇에 시간이 반 만 담겨 있습니다. 반이라 모자라고 반이라 충분합니다. 끊임없이 반을 채우고 반을 비워나가겠습니다. 반구저기(反求諸己) 하겠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다 쓰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쓰고 싶지 않은 것은 쓰지 않은 편지”(225쪽) 였습니다.
폭우부터 폭염까지 극단의 마음을 접고 당신들과 더불어 여름을 배웅하고 먼 길을 돌아 온 가을을 맞아들입니다.『담론』이 쏘아올린 얼굴들은 이내 사라지는 불꽃이 아니라 밤마다 우리를 비추는 별자리입니다. ‘마지막 뒤풀이’에서 만납시다!
지난여름을 두고 돌아서기 아쉬워 자꾸만 거꾸로 걷게 되는 9월에
★ 마지막 뒤풀이
당신이 돌아왔다
눈먼 낙과가 지팡이로 공중을 지치며
빈 나뭇가지를 찾아가듯 얼어붙은 강을 건너왔다
첨탑의 뿌리가 손금처럼 뻗친 손바닥만 한 도시에서
갓 태어난 당신은 눈도 못 뜨고
좁고 긴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한 줌 석양을 마시고 있었다
창문과 창틀 사이에 낀 몇 가닥의 머리카락처럼
곱슬곱슬한 숨을 내쉬는 당신은
낯선 소도시의 거대한 요람인 광장에서
리아스식 발가락으로 붉은 파도를 타고 있었다
훌쩍 큰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 돌아보았다
스무 살의 당신과 마흔 살의 내가 양 끝을 붙잡고 돌리는
새하얀 줄 사이로 여든 살 당신이 일렁이고 있었다
몰려든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우리가 줄을 돌리고 넘고 타는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팔을 치켜들며 결승선을 통과한 마라토너처럼
어둠이 배를 깔며 바닥을 덮쳤고 우리는 손목을 놓쳤다
이별이 돌아왔다
당신은 떠났고 계속 떠나고 있다
뒤풀이가 끝난 뒤 비로소
뒤풀이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