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대학 동기였던 친구 선이를 만나는 날이었다.
선이는 새내기 시절부터 알아왔던 사이로 나와는 정반대인 성향을 가진 친구였다. 항상 수업에 빠지고 흥청망청 놀러 다니기에만 정신 팔려있던 내 옆에서 국어 선생님이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열심히 공부하며, 과탑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던 모범 학생이었다. 이렇게 정반대였던 우리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학교 시절 동안 선이는 내게 많은 도움을 줬으며 졸업을 하고 나서도 1-2년에 한 번 정도 얼굴을 보며 인연을 이어가는 사이였다.
먼저 도착한 내가 선 이에게 어디쯤인지 위치 확인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화면에 선이의 이름이 뜬 건 오랜만이기에 조금 낯선 느낌이 있었다.
"여보세요, 선아 어디야?"
"도착했어? 나 지하주차장에 차대고 있어. 좀만 기다려줘!"
"차? 응응, 알겠어. 조심히 와!"
차? 자가용? 운전하는 차?! 스물여덟이면 개인 자가용 하나쯤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시기였으나, 나는 스무 살 시절의 선이만 줄곧 기억했기에 자기 명의에 자동차를 몰고 온 그 친구가 조금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곧장 만나고 나서도 한껏 성숙해진 그녀의 외관에 놀라고, 오래 사귄 남자 친구와 예비 신혼부부 주택청약을 신청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라게 되었다. 얘,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된 거지?
내 건너 건너, 혹은 먼 지인들이 결혼을 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이렇게 가까운 사람이 예비 신부가 된다는 것에 대해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와 같은 세계에 있던 친구가 저 멀리 어른의 섬으로 떠나간 기분이었다. 나는 아직도 만화나 똥방귀에도 자지러지게 웃는 애자식인데, 선이는 자동차세도 내고 중학생 아이들도 가르치는 학원 강사가 되어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모양새를 제법 갖춘 인간이 되어있었다.
어른이 된 선이와의 만남은 스무 살 때처럼 즐거웠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 친구가 했던 말이 떠나가지 않았다.
"넌 언제 만나도 그대로야, 정말 똑같아."
물론 나쁜의 도로 말한 게 아니었겠지만, 내 마음속 언저리에 자리 잡혀 있는 '도태된 자신'때문에 난 저 말이 자꾸 생각났다. 난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겉만 늙은 애인데. 나와 같은 나이를 먹고 같은 대학을 나온 선이는 어느새 진짜 어른이 되어서 나날이 성숙해져 가고 있었다.
이렇게 선이를 시작으로 앞으로 내 주변 사람들이 나만 내버려 두고 전부 어른의 세계로 갈 것 같다는 불안감이 차츰 밀려왔다. 난 아직 자동차도 안 사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지 않고, 새로운 일도 더 해보고 싶은 사람인데 어느새 주변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는 것에 집중하며 어른의 정석 루트를 밟아가는 중 같았다.
왜 다들 이렇게 빨리 어른이 되는 거지? 아니, 내가 나잇값을 못하는걸 남 탓하는 걸까?
이기적인 마음으로 내가 어른이 되기 싫어, 주변 사람들도 나와 같이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이 큰 게 맞았다. 난 여전히 철이 없었지만 그 철없음이 나쁘지 않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는 내가 좋았으며, 아직은 홀로 살아도 외로움보다는 만족스러움이 컸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나와 있던 세계를 떠난다면 그 수순을 같이 밟지 못한 내게 낙오자라는 오명이 씌워질 것 같아 싫었다.
언젠가 내가 만족하고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도태됨'으로 변해있을까 봐 두렵다.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잡기에는 아직 내 정신과 마음은 느리게만 움직인다. (어쩌면 그 자리에 멈춰있는 걸 수도 있다.) 아직은 평생 애가 되고 싶은 '가짜 어른'인 나에게 오늘 선이와의 만남은 조금 현실을 자각시켜주는 알고 싶지 않지만, 알아야만 했었던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