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각이 나를 괴롭히던 시기가 있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물어 나락까지 가야만 직성이 풀리고, 한 가지 문제에 최악의 순간을 상상하며 해결방법까지 구상을 해야 다음 생각으로 갈 수 있던 난, 아침에 일어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왜냐고? 깨어있으면 또 망할 뇌가 지긋지긋한 생각을 할 테니깐!" 그럼 후자는 당연히 '생각을 그만하면 되잖아.'라는 단순하고 어쩌면 명쾌한 해답일 수 있는 말을 간단히 내뱉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사람들에겐 그건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술을 끊을 수 없는 알코올 중독자들처럼 나 또한 생각을 끊을 수 없었고, 애초에 그 방법 또한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가 나오던 방송 중, PD가 스트레칭을 하던 김연아 선수에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물었다. 그때, 김연아 선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고 말했다. 나는 김연아 선수의 어이없는 표정과 대답에서 꽤나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는 거지?
내가 그녀였다면, 다리를 찢는 순간에도 오늘 경기에서 실수하면 어떡하지, 준비물은 잘 챙겼을까, 만약 내가 스핀을 제대로 돌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럼 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등등 온갖 잡생각들이 머리를 헤집다 못해 PD에게 먼저 말을 걸며 "이렇게 되면 어쩌죠?" 라며 불안에 떨었을 것이다.
깊이 있는 생각은 상상력과 지적 성숙에 도움을 주지만, 위 같이 쓸데없는 걱정들은 곰팡이처럼 천천히 삶을 좀먹을 뿐이었다. 그래서 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 위하여 전문가 선생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도박중독자들이 혼자 힘으로 도박을 끊을 수 없듯이, 나 또한 스스로의 노력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수준인걸 알았다. 내 행복을 위하여, 나의 삶을 구원하기 위하여 상담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께서는 내 얘기를 쭉 듣더니, 수많은 생각과 걱정들 중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 있냐고 다정스레 물었다. 난 거의 없다고 대답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0.1% 가능성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생각에 빠뜨린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런 나에게 선생님은 범불안장애라는 진단을 내려줬다. 범불안장애는 광범위하게 지나친 불안을 느끼며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질환'이었다.
단순히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나에게는 뜻밖의 이야기였다. 선생님은 약 처방과 함께 당분간 상담 진행을 계속할 것을 권유했고 나는 받아들였다. 그리고 상담실을 벗어나기 전, 선생님께 궁금했던 마지막 질문을 했다.
"생각을 하지 않는 삶은 어떤 거죠? 무엇이 대체가 되는 걸까요?"
이때, 난 조금 울먹거렸던거 같다. 한평생을 걱정과 불안한 생각들로만 살아왔는데, 앞으로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부정적인 것들이 사그라져간다 생각하니 의심이 가기도 했고 기대가 되기도 했다.
선생님은 눈에 호선을 그리며 "앞으로 영자 씨와 제가 함께 무엇으로 채워갈지 알아보는 거예요. 점점 생각과 불안을 줄여갈 수 있도록 제가 노력할게요. 그동안 많이 힘드셨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첫 상담이 끝나고, 이후로 나는 4개월 넘게 선생님과 만나며 내 삶의 방향과 감정, 문제들에 대해 끝없는 이야기들을 하는 중이다. 그리고 차츰 나비가 번데기에서 탈피하는 과정처럼 내 머릿속의 생각도 더 이상 예전처럼 부정적이거나 고민들로만 가득 차 있지 않는다. 이젠 앞으로 무엇을 해야 더 즐거울지, 또 내 행복을 위해 스스로가 해줄 수 있는 건 뭐가 있는지에 관한 고민들이 8할을 차지할 정도다.
아직 나조차도 완전하지 않지만,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내 상황에 공감하고 꼬리를 무는 생각에 힘이 든다면 그걸 단순한 습관으로 치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스스로 해결하기 힘든 과제이자 치유받아야 할 마음의 병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 번쯤 용기를 내 주변에 도움을 청해보자. 그럼 아마, 아주 조금이라도 나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게 실패든 성공이든 나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사랑한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