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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영 Feb 02. 2022

샤갈 전시회와 성수동 데이트

내 친구, 소중한 윤이와 함께

지루한 연휴 끝자락, 대학교 친구이자 베스트 프렌드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나의 소중한 벗, 윤이와 전시회 약속을 잡았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었고, 한 학번 어린 후배로 학교 방송국 동아리에서 만나 인연이 닿았지만 중간 과정은 이야기하기 길어 생략하자. 오늘 날이 추운데도 불구하고 내 기분은 조금 들떠 꼬까옷을 걸쳐 입고 꽤나 점잔 뺀 모습으로 구두까지 신으며 집을 나섰다.


아이고, 추워라. 맨다리에 치마는 역시 오버였나 싶었다. 그래도 뭔가 항상 나를 예쁘다고 해주는 그녀 앞에서 추례하게 보이고 싶지는 않기에 개의치 않고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전시회장에 도착했다. 추운 날이었고, 명절 연휴라 그런지 전시회장은 한산했다. 그리고 얼마 뒤 저 멀리서 도착하는 윤이 모습을 흐릿하게 발견했다. 회색 조끼에 검은 코트를 입고 그녀의 통통한 볼은 한껏 추위에 상기되어 벌게졌었다.


샤갈 특별전을 보려면 삼성역까지 가야했다. 역삼을 지나는 길이(내일 출근길) 어쩐지 묘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사진 한번 찍고 들어가자." 의례 하는 관례처럼 우리는 만나자마자 바로 포토존 앞에서 사진을 찍고 곧바로 전시회장으로 들어섰다. 샤갈 특별전은 내가 먼저 그녀에게 보러 가자고 제안했던 일정이지만, 솔직히 보고 나서  취향이 아니기에 얼른 커피 한잔 하러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역시나, 7년 지기 답게 서윤이도 그걸 알아차리곤 배시시 웃으며 "그래, 너 뭔가 빨리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더라."라고 말했다. 그리곤 전시회장을 나와 우린 삼성역에서 성수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는데, 제일 중요한 주제는 윤이와 윤이 남자 친구와의 다툼에 대한 문제였다. 웃지 말아야 할 상황에서 난 가끔씩 들리는 그녀의 난폭한 언행에 웃음이 났고, 이상하게도 윤이가 진지한 말을 하고 있을 때면  나도 모르게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 자연스레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그리고 괜히 이상한 표정과 목소리로 골려 주고 싶달까? 마치 남자 꼬마들이 좋아하는 여자애를 놀릴 때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 보면 난 아직도 어른은 아닌 것 같다. 아마, 윤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아직 우리는 어른이라고 하기엔 너무 유치하고, 아이라고 하기엔 생각의 깊이가 깊어졌고 꽤나 진지한 면도 생겼다.


그럼 너와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7년간 함께 해오면서도 알지 못할 미스터리이다.


어느새 성수동에 도착해, 회사 직원에게 추천받은 연무장이라는 카페로 갔다. 엘리베이터 8층을 타고 올라가자마자 빼곡한 사람들과 드넓은 창틀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쪼르륵 마시며 우리는 계획했던 우정반지를 골라보기로 했다. 20대 초반에 탄생석으로 했던 우정반지를 둘 다 잃어버려 이번에는 금으로 아예 새로 장만하기로 했던 것이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서로가 안목이 비슷해진 건지, 이니셜을 각인할 수 있는 동일한 디자인으로 서로 고르곤 놀랐다.


"그럼, 이니셜은 뭘로 새기지?"

"음... 서로의 이니셜... 아니면 라스트 홀리데이?"

"라스트 홀리데이 좋다! 예전부터 우리 구호였잖아!"

"그럼 줄여서 L.H.D로 박자."


서윤이는 좋다고 말했다. 라스트 홀리데이는 우리 서로가 감명 깊게 본 영화로, 20대 때부터 한참 '오늘 하루를 마지막 휴가처럼 살자!'라는 뜻에서 구호처럼 외치고 다녔던 말이었다. 무엇을 새기기에는 이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다고 생각하면서 서로의 동의 끝에 우리의 우정반지 계획은 멋지게 끝마쳤다.


계획도 끝났겠다, 배를 채우고 살짝 취할겸 와인바에 갔다. 분위기와 서비스가 매우 좋았고 음식과 와인도 맛있었다.

근처 알아보았던 와인 바에 가니 손님도 없고 한적해 우리는 바 자리로 가 앉았다. 뭔가 서로를 마주 보는 테이블 자리도 좋지만, 가끔은 나란히 앉아 시선을 달리하며 각자의 얘기를 나누는 자리도 좋다.


달큼한 술 한 모금이 들어가자 아까 말했던 조금 진지한 면모들이 나타났다. 속 깊은 대화들이 한 두 마디 이어나가면서 요즘 내가 처했던 고민들과 고백들, 윤이의 상황과 앞으로의 일들을 주고받으며 의미 있고 서로가 서로를 더욱 신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새겨질 반지의 이니셜처럼 항상 하루를 마지막 휴가처럼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자고도 말했다.


나는 윤이의 앞날을 응원했고, 그녀는 현재의 나를 칭찬해주고 보듬어줬다. 우린 친구로서, 인간으로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는 자리였다. 연인과 가족이 아니더라도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해주는 내 소중한 인연.


난 윤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정말. 내가 행복한만큼 그 이상으로 그녀가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나와 같이 늙어 꼬부랑 할머니가 됐어도 우리가 아직도 어른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그런 친구로 영원히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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