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소설, 콩국수...보다 에어컨
너무 더운 날이었다. 혼자 있을 때는 가급적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고 버텨보려고 했다. 오전 한나절을 버텨보니 도저히 아무것도 할 의욕이 생겨나질 않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솟아나고 높은 습도에 물속을 헤집고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책도 안 잡히고, 글도 못쓰겠고, 입맛도 없고, 집안일도 엄두가 안 나고, 몸은 여기저기 더 아픈 것 같아 신경은 곤두섰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에어컨을 가동했다. 제주에 여행 간 큰 아이가 돌아오는 비행기에 탑승한다는 문자를 받고 나서였다. 에어컨을 가동하고, 청소를 하고, 쾌적해진 집에 있으니 그제야 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얄롬의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를 끝냈다. 이 소설은 안나 O라는 여성의 정신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최초로 정신분석이라는 방법을 시도했던 요제프 브로이어 교수와 철학자 니체의 가상의 만남을 소재로 한 매우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안나 O와 브로이어 교수는 최근 심리학 책을 몇 권 읽으면서 연거푸 등장했던 인물들이라 소설에서 만나니 더 반가웠다. 브로이어와 니체는 실제로 만난 기록이 없다고 한다. 작가 후기에서 얄롬은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어쩌면 두 사람은 만날 뻔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허구는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역사다"는 앙드레 지드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소설 속에서 브로이어와 니체를 이어준 루 살로메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기도 했다. 루 살로메는 여러 예술가들에게 뮤즈이면서 대표적인 팜므파탈 중 한 명이다.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루 살로메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생겨 찾아보니 그녀의 삶이 새삼 놀랍기만 하다. 파울 레와 니체와 살로메는 소설에서 그려진 바와 같이 실제로 삼각관계에 있었다. 두 남자는 살로메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니체는 그 절망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역작을 만들어 냈고, 파울 레는 니체가 죽은 다음 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 후, 살로메는 칼 안드레아스라는 동양학과 교수의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겠다는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결혼하여 베를린에 살았다. 그 결혼은 성생활이 없는 형식적인 계약관계였다. 후에 살로메는 자신보다 14살 연하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원래 이름이 르네 마리아 릴케였다고 하는데 살로메가 르네라는 이름이 너무 여성적이니 라이너로 바꿀 것을 조언했다고 한다. 3년 간의 열애 끝에 두 사람은 헤어졌지만 릴케는 그 후 작품활동에 매진하여 놀라운 작품들을 세상에 남겨놓았다. 헤어진 후에도 그들은 서로 영감을 주고받았다고 하니 릴케 평생의 뮤즈였던 셈이다. 나이가 들어 쉰이 넘어서 살로메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제자가 되었고, 프로이트는 그녀를 제자 이상으로 아꼈다. 그 외에도 톨스토이, 아들러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당대 지성인들과의 폭넓은 교류를 이어나가면서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열정을 불태우게 하고 영감을 준 놀라운 여자였다. 그녀가 남긴 글도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하여 책을 뒤져봤는데 모조리 절판되었다. 몇 해전 <루 살로메>라는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지만 관람객 수도 형편없었고, 어디서도 그 영화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나간 시대를 요란하게 살았을 뿐인 인물이 돼버린 건가?
얄롬의 상상력으로 실존 인물들의 삶과 허구의 사건들이 연결된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니체가 정말 브로이어를 만나서 두 사람이 이런 우정을 만들어갔다면 어땠을까? 얄롬의 책인데, 니체의 경이로운 언어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덤이었다. 밑줄을 긋고 보면 니체의 말인 경우가 많아서 다시 니체를 읽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니체를 읽으면 그의 고통에 더해 내 몸이 더 아플 것 같아서 망설이게 된다.
남편은 늦는대서 일찌감치 아이들을 데리고 집 앞에 나가 콩국수 한 그릇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면 절반은 아들에게 넘기고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다. 더위가 그런대로 견딜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