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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an 13. 2024

<한옥 대목반>구들과 개자리

- 대목과정의 첫번째 퇴고버전: 스물 네번째 이야기

  선생님이 지게차로 야외에 쌓여 있던 벽돌과 구들장을 실내 실습장으로 날라 왔다. 2월말이 다 되어가는 데도 평창의 추위는 전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옥학교에서는 맞배집과 사모정을 짓는 실습과정이 거의 마무리되어 갔다. 집의 외관이 완성되면 내부 작업을 해야 하는 데,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구들을 설치하는 것이다. 외부 실습장에서 땅을 파고 구들을 놓아야 하는데, 얼어붙은 땅을 파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추워서 실습을 진행하기 어려웠다. 결국 나와 동료들은 구들 놓는 것을 실내 실습장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한옥 구들은 고래와 고래 둑, 구들장, 개자리, 연기가 통하는 연도, 그리고 굴뚝으로 구성돼요. 구들장 밑에 만든 고래에 불길과 연기가 잘 통해서, 구들 전체에 골고루 열을 전달하게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하죠.”

  구들은 온돌(溫突)이라고도 하는데, 구들은 ‘구운 돌’, 온돌은 ‘따뜻하게 데운 돌’에서 유래된 단어로 추정된다. 고래는 아궁이에서 지핀 불이 방바닥 곳곳에 도달하도록, 둑을 쌓아서 만들어낸 불길이다. 방바닥을 골고루 데울 수 있도록, 고래 바닥을 아궁이 바닥보다 약간 높게 만든다. 뜨거운 공기가 위로 향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구들장에 쓰인 돌도 열이나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 백운모(白雲母)를 사용하여, 뜨거운 열기가 한꺼번에 전달되지 않도록 했다. 백운모의 주성분이 알루미늄과 규소로 이루어져, 열에 잘 견디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구들장도 뜨거운 아궁이와 가까운 아랫목에는 윗목보다 두꺼운 돌을 사용하였다. 아궁이에 가까울수록 불의 세기가 강하기 때문이다. 

  고래의 불길을 따라 둑과 같은 형태로 쌓아, 구들장을 받치는 것을 ‘고래둑’이라고 한다. 고래가 끝나는 곳에서 고래 방향과 수직을 이루도록 벽선을 따라 골을 깊게 파는 데, 이것이 ‘개자리’이다. 보통 이 위에 굴뚝이 세워진다.


  우리는 먼저 벽돌로 고래 둑을 쌓기 시작하였다. 불을 피우는 아궁이를 시작점으로 고래 둑을 여러 갈래로 쌓아 나갔다. 벽돌이 없었던 옛날에는 돌로 했던 작업이다. 직사각형의 일정한 모양을 가진 벽돌에 비해서, 자연에서 구해온 돌과 돌 사이에는 열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이 많았을 것이다. 이것을 흙으로 메우는 작업을 했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정성과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으로 상상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2~3명이 한 그룹이 되어서, 각각의 고래 둑을 만들어갔다. 각 그룹은 경쟁적으로 여러 개의 고래 둑을 쌓으면서, 고래자리를 만들었다. 

  작업을 하다 말고 용식이가 선생님에게 웃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개자리가 뭐예요? 왜 개자리라고 불러요?”

  “개자리는 굴뚝 밑을 깊게 파서 만드는데, 연기가 역류되는 것을 막고 그을음이나 재를 가라앉히는 역할을 하지.”

  선생님이 개자리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자, 옆에서 듣던 일현이가 끼어들었다. 

  “옛날에는 개자리가 따뜻해서 개들이 그곳에서 잠을 자곤 했대. 그러다가 구들에 불을 지피면 죽는 개들이 많았다고 해서, 개자리라고 이름 붙였다고 하네.”

  웃픈 이야기였다. 구들이 지금과 같이 온전한 형태로 자리잡기 전에는, 개자리가 개방된 형태여서 개들의 출입이 자유로웠다고 한다. 굴뚝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추운 겨울철에 개자리는 개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따뜻하고 아늑한 적당한 크기의 장소였을 테니까.

  사실 구들을 이용해서 온돌방을 만든 것조차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반도는 비교적온난한 기후였기 때문에, 화덕이나 화로를 집안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단지 추운 고구려 지역에서는 납작한 강돌을 두줄로 세우고, 그 밑을 진흙으로 다져 만든 외고래 온돌이 발견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전국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금님이 생활하던 궁궐에도 온돌방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6~17세기에 이르러서야 사대부집들까지 구들이 퍼져 나갔다고 한다. 백성들이 사는 한옥집에 구들을 놓은 것은 한참 뒤였다. 구들을 깔기 시작하고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집 바깥쪽으로 높이 솟은 굴뚝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나는 어렸을 때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전라도의 벽촌에서 자랐다. 집이 구들방 구조로 만들어져 있어서, 겨울철이면 부엌 아궁이에 나무로 불을 때서 방을 덥히곤 했었다. 나는 따뜻한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서, 불을 쬐는 것을 좋아했었다. 불이 내뿜는 열기가 내 몸을 따뜻하게 감싸 주어서 좋았다. 나무의 ‘따닥 따닥’ 타들어 가는 소리에 최면에 걸린 것처럼 빠져들기도 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어머니와 할머니가 분주하게 오갔지만, 나는 따뜻한 아궁이 불에 정신을 맡기고 멍하니 앉아 있곤 했었다. 

  “불 장난하고 자면 옷에 오줌을 싸니까, 얼른 방으로 들어가라.”

  내가 부엌에서 장작을 태울 때마다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하면서, 나를 방으로 쫓아냈던 기억도 난다. 아마 좁은 부엌에 내가 앉아 있어서 걸리적거렸을 것이다. 저녁식사를 위해서 안방에 가족들이 둘러앉으면, 아랫목이 너무 뜨거워서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잠을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옆에서 주무시던 할아버지께서 한마디 하시곤 했다. 

  “너는 왜 자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냐? 새벽에 깨 보니까, 저기 추운 윗목에서 자고 있던데?”

  나도 내가 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자는 지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랫목이 너무 뜨거워서, 시원한 윗목으로 도망간 것 같다. 아랫목이 얼마나 뜨거운 지, 방바닥이 시커멓게 탔을 정도였으니까.


  구들 쌓는 작업이 얼추 마무리되었을 때, 호권이가 목탄난로에서 잘 익은 호박 고구마를 꺼냈다. 집에서 호박고구마를 여러 개 들고 와서, 목탄난로에 넣어 놓았던 것이다. 너무 뜨거워서 작업용 장갑을 끼고 껍질을 벗겨야만 했다. 어느 순간 우리들은 목탄 난로 주변에 빙 둘러서서, 호박고구마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구마를 ‘후후’ 불어가면서, 한입씩 떼어먹는 맛은 너무 달았다. 

  그때 누군가가 구들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도 구들을 보면서 어렸을 때 추억이 생각났어. 추운 겨울이면 따뜻한 구들방에 가족들이 둘러 앉아서, 화톳불에 알밤을 구워 먹기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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