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농 첫해에 겪은 서른 여섯번째 이야기
횡성군 둔내면은 해발 650미터 정도 되는 곳이다. 보통 10월중순이면 첫서리가 내린다. 서리는 농작물에 큰 피해를 가져다주는 존재이다. 작물들이 얼어버리는 것이다. ‘농촌에서 살아보기’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2022년 10월중순에도 서리가 내리면서, 하루 밤만에 고추가 모두 얼어버렸던 기억이 있다. 고추 잎은 영하 1도 정도만 되어도 동해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토마토도 역시 첫서리가 내리는 시기까지 수확을 할 수 있다. 첫서리가 내리는 시기가 다가오면, 그 50일 전후에 순지르기를 해준다. 순지르기는 본가지의 순과 그 윗잎 몇개를 남겨놓고 잘라주는 과정이다. 토마토가 새롭게 열매 맺지 못하도록 싹을 잘라주는 것이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새로운 토마토가 충분히 자라고 익을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존에 열린 토마토에 영양분을 집중시켜 주는 목적에서 진행한다.
나는 2023년 8월말에 이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날도 보통때와 비슷하게 아침 7시가 되기 전에 하우스에 도착하였다. 하우스 문을 열어준 다음, 멀칭 비닐 밑으로 뻗어있는 토마토 뿌리 근처 흙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보았다. 흙을 만져보고 수분 상태가 적당한 지 체크하기 위함이었다. 흐린 날씨가 계속되면서 토마토의 수분 흡수가 크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약간의 물만 관주해주었다. 점적 테이프로 물이 들어가는 사이에 이랑 사이 사이를 걸어가면서, 토마토의 상태를 체크하였다. 매일 하우스에 도착하면 규칙적으로 진행했던 나의 일과였다.
지난 몇일동안 순지르기를 계속 해와서, 남아있는 작업이 많지 않았다. 순지르기와 같이 잘라내는 줄기의 단면적이 큰 작업을 할 때는 가위보다는 날카로운 칼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 가위로 잘라내면 단면이 뭉게지게 되고, 이곳이 병균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농사를 짓는 나에게는 그런 지식이 없어서, 작업하기 편한 가위를 가지고 진행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자란 순과 그 위에 자란 잎들 몇 개를 남겨두고 잘라 나갔다.
순지르기를 하면서 토마토를 살펴보니까, 곁순들이 부쩍 늘어난 것이 눈에 띄었다. 토마토가 늙어가고 기온도 점차 떨어지다 보니까, 후손을 퍼뜨리기 위한 생식성장을 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곁순을 키워서 더 많은 토마토 열매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무들은 정아 우세성이 강해서 본줄기 중심으로 성장하려는 성질이 강한데 비해, 토마토는 측아 우세성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재배기간 내내 곁순의 성장이 왕성하기 때문에, 적절한 시점에 이것들을 제거해주지 않으면 본줄기의 성장이 더디게 된다. 하물며 마지막 토마토 열매에 영양분을 몰아주어야 하는 시점이어서, 곁순도 적극적으로 제거해줬다.
토마토의 순지르기 작업을 진행하면서, 문득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제2의 삶을 준비하고 있는 나이기에 그런 생각이 든 것일지도 모른다. 토마토는 자신이 살아갈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남아있는 시간과 영양분을 온전히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투입한다. 여기 저기 곁순을 만들어서 새로운 토마토 열매를 만들려고 한다. 토마토 열매가 잘 여물도록 영양분을 집중적으로 공급해준다. 더 이상은 연약해져가는 본줄기를 키우는 작업에 헛되이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다. 순지르기 작업이 진행되면 더더욱 남아있는 토마토 열매를 건강하게 키우는 작업에 몰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람도 제2의 삶을 살면서 저마다 가치있다고 느끼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은퇴를 하면서 사회적 활동 범위가 축소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가지치기가 이뤄지게 된다. 또한 젊을 때와 다르게 많은 일에 에너지를 쓰는 것은 몸에 무리가 따른다. 그만큼 육체의 강건함이 떨어졌을 뿐 아니라 남아있는 삶의 시간도 젊을 때보다 짧다. 그래서 노년기에 접어들면 꼭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 시간이 사회에 기여하고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기에 적합한 시기인 것 같다. 토마토가 후손들을 위해 온 몸의 영양분을 몰아주듯이. 수십 년간의 사회생활을 통해서 많은 경험을 쌓아 왔을 뿐 아니라, 사회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청장년시기에는 많은 것들을 생산해내는 기간이었다면, 노년기는 되돌려줘야 하는 때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지구온난화 현상의 영향일까? 2023년에는 11월 초가 되어서야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순지르기를 좀 이르게 한 결과가 초래되었지만, 이미 결실을 맺었던 마지막 토마토들이 튼실하게 자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 원래 10월 중순까지만 수확을 하려고 했는데, 남아있던 토마토들이 잘 숙성되었기에 10월말에도 지인들에게 토마토를 보내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