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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Mar 05. 2022

<서른번째 이야기> 미세먼지 vs. 하얀 눈

  매주 금요일 오후 5시 10분 수업이 끝나는 대로, 가족이 있는 인천으로 차를 몰아가곤 한다. 주말에 가족과 같이 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차량 정체로 3시간이나 걸리는 길이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운전을 할 수 있었다. 

  거꾸로 매주 월요일 새벽 5시에 평창으로 가는 길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출발하곤 했다. 가족과 헤어져서 평창에서 혼자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월 둘째주 월요일에는 근래에 보기 드물 정도의 짙은 미세먼지가 끼었다. 무거운 마음을 더욱 가라앉게 만들었다. 복잡한 수도권 외곽 고속도로를 벗어나 광주 – 원주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미세먼지가 약간 약해졌다. 

  우울해지는 마음을 달래보기 위해, 아내가 밤새 준비해준 김밥을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아내는 매주 일요일 밤이면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내가 평창에서 먹어야 할 반찬이며 국을 준비해준다. 수업에 늦지 않게, 월요일 새벽 5시에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다. 

  내가 30여년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제2의 삶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아내도 힘들고 불안했을 것이다. 그동안 한번도 해본 일이 없는 한옥 대목수업을 듣겠다고 나섰을 때, 많이 당황했을 것이다. 그것도 강원도 평창에서 일주일 내내 지내면서. 하지만 한번도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용기를 주었다. 내가 겪어나갈 시행착오를 경험해보라고 응원까지 해주었다. 

  젊었을 때는 서로의 삶을 살아가느라, 서로를 깊이 쳐다볼 시간이 부족했었다. 결혼한지 30년이 지나면서 제2의 삶이라는 큰 변화를 앞두고, 오히려 서로의 사랑을 더 깊숙하게 느낄 수 있다. ‘현모양처’라는 말은 젊은 시절보다 오히려 나이 들면서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나뿐 아니라 두 아이들도 대학교를 졸업하는 시점이어서, 사회로 나가야 하는 큰 환경변화를 겪고 있다. 이럴 때 응원해주고 기도해주는 아내와 엄마가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지 모르겠다. 묵묵히 가족들이 나아갈 길을 지켜 봐주고 기도해주는 아내가 고맙다.

  뿌연 미세먼지는 평창까지도 침범해 있었다. 학교로 걸어가는 길에도 미세먼지가 잔뜩 쌓여 있어서, 먼 산이 뿌옇게 보였다. 어쩌다가 이곳 청정한 강원도까지 인공 미세먼지가 침범하였는지… 


  미세먼지가 싫어서 일까? 학교가는 길에 항상 나를 반겨주던 나무들이 모두 이슬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미세먼지보다는 추워도 이슬이 더 나은가 보다. 


  미세먼지를 뚫고 걸어가다 보니까, 언젠가 푸릇푸릇한 배추들이 자라던 배추밭에 다다랐다. 배추가 자라면서 이슬을 몇 번 맞게 되면, 상품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뽑지 않고 버려진 배추들이, 시들어진 모습으로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주인을 위해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인가? 시들어진 모습으로 거름이 되어, 다음에 나올 배추들을 위해서 제 한 몸을 불사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위해 헌신하는 배추들이 부러웠다.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스토리에 얽매어 사는 나보다 나은 것 같았다. 



  매주 월요일마다 진행되는 Sketch-up 시간이 부담스러운데, 미세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온 이날은 더욱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미세먼지가 월요병을 진하게 만든 것이다. 지난 주말에 내 PC로 Sketch-up을 복습하다가, 일부 기능이 작동이 안 되는 바람에 연습을 충분히 못했다. 그래서 학교에 좀 일찍 가서, 교실에 있는 PC로 지난주에 배웠던 부분을 복습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서투른 탓에 2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다행히 그 시간 동안 선생님이 처음부터 복습을 해주는 바람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날은 지붕까지 모두 설계하면서, Sketch-up으로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작업을 마무리했다. 다음 시간에는 지금까지 설계한 12평짜리 맞배집을 기본으로, 자신이 짓고 싶은 집을 스케치 해오란다. 그것에 맞게 Sketch-up으로 설계도를 그려보자는 제안이었다.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정작 Sketch-up으로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너무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미세먼지에 Sketch-up으로 월요병을 찐하게 앓은 다음 날은, 전혀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밤새 함박눈이 내린 것이다. 평창에서 지낸 지난 몇개월중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내린 날이었다. 아침 등교 길에 눈을 밟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를 들으면서 걸을 수 있어서 기분 좋았다. 눈길을 걸으면서, 문득 머리 속을 스쳐가는 글들을 핸드폰에 기록해 두었다.


흰 눈이 내린다. 점점 세상을 하얗게 덮어 가면서.

땅이 가진 희로애락을 모두 하얀색으로 치장한다. 

마치 새로운 봄이 오니까, 지난 일은 하얗게 잊어 버리라고 이야기하듯이,

사람이 가진 기쁨과 슬픔을 모두 새하얗게 만들어 버린다.

마치 새로운 삶의 스토리가 기다리니까,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지 말라고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눈은 사람과 땅의 캔버스를 새롭게 마련해준다.


  등교 길에 있는 마을의 작은 산등성이를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몸에서 스며 나오는 땀을 식혀 가라는듯이, 차가운 바람이 피부를 스쳐 지나간다. 차가운 바람이 주는 시원한 청량감을 즐기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노란 점퍼를 입은 꾸부정한 노인이 앞에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눈보라가 날리는 산 정상의 도로 길을 아침 일찍부터 저렇게 힘없이 걸어가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노인을 막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그가 나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형님, 잘 주무셨어요?”

  흠칫 놀라 쳐다 보니까, 같은 학교 후배 동료인 용섭이였다. 한달 전쯤 큰 통나무에 깔려서, 다리가 부러졌었다. 덕분에 지금은 기브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다니고 있다. 빨리 낫고 싶은 마음에, 그날 아침에도 운동 삼아 걷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데 춥다 보니까, 웅크린 모습으로 천천히 걷고 있었던 것이다. 참 대단한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한 다리를 한 채 매일 수업에 참관하고 운동까지 하고 있으니까… 나보다 어린 친구지만 참 배울 게 많다.

  자연뿐 아니라 동료들도 배움을 주는 평창의 생활이다. 내가 한옥학교를 졸업하고 목수 생활을 할 것은 아니지만, 6개월동안에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워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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