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문체의 실험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평론 스타일이 두 개 있다. 영화가 재밌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신나게 떠드는 것과 영화를 복습하듯 줄거리만 달달 써 내리는 것. 그런 글은 사실 평론이라 할 수 없고 감상이라 해야 함이 옳다. 인터넷에는 그런 감상들이 넘쳐난다. 본 영화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쓴 글을 드러내려는 욕심이 앞설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는 그런 걸 경계해서 최대한 영화의 구조를 파악하려고 애쓴다. 아무리 삼류 영화라 할지라도 스토리의 뼈대가 있기 마련이다. 인물들은 그걸 바탕으로 하여 움직이고, 오가는 대사도 그 자장 안에서 형성되며, 감독이 숨긴 디테일도 그 논리에 맞게 풀이된다. 구조를 찾아서 들어 올리면 많은 것들이 딸려 와 영화가 절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과 비평의 일착은 내러티브를 파악하는 일이다. 종합 예술인 영화의 본령은 역시나 문학이다. 움직이는 이미지를 움직이게 하는 게 문학이므로 영화에서 각본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녔다. 연출, 연기, 그 밖의 요소가 부진해도 각본이 훌륭하면 평작의 영화가 된다. 반면에 연출, 연기, 그 밖의 것이 훌륭해도 각본이 부진하면 망작의 평가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잘 만든 영화는 언제나 잘 만든 각본을 깔고 있다. 영화를 잘 만들었다 함은 최소 절반 이상 각본에 대한 칭찬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문학인인 저자가 문학의 시선으로 영화를 분석한 글을 모은 것이다. <씨네21>에 '신형철의 스토리-텔링'이라는 제목으로 매달 연재했던 글이라고 한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 책의 임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화라는 매체의 문법을 잘 모르는 내가 감히 영화평론을 쓸 수는 없다. 영화를 일종의 활동서사로 간주하고, 문학평론가로서 물을 수 있는 것만 겨우 물어보려 한다.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하고." 그만큼 영화의 문학성에 집중한 책이므로 비평을 잘 쓰고 싶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고, 감히 비평의 교본이라 부른다. 총 22개의 글이 담겨 있고 사랑, 욕망, 윤리(사회), 성장의 테마로 분류돼 있다. 책을 다 읽고, 이 정도로 쓸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중에 어떤 것은 이상과 모범이 되어 길을 제시할 때가 있는데 나에겐 이 책이 바로 그런 거였다. 영화에서 이야기의 플롯이 중요하고 그걸 우선적으로 분석하는 게 옳은 비평이라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런 지론으로 적절한 평론서를 찾고 있었는데 이 책이 신의 계시처럼 해답이 되어준 것이다. 내 글쓰기에(비록 아마추어지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책 속에 소개된 여러 영화 중 본 영화보다 안 본 영화가 더 많다. 그럼에도 이 평론집이 영화를 본 것처럼 흥미로웠던 까닭은 저자의 필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필력은 문체 같은 형식적 측면뿐 아니라 통찰력 같은 내용적 측면까지 포괄하는 뜻이다. 작품(영화)을 들여다보는 인식의 깊이와 논리의 전개가 구도처럼 심중하고 진실하다. 잘 모르는데 미문으로만 승부해보려는 글 혹은 '힙(hip)하다'는 수식어를 내세워 무지와 객기를 교묘하게 감춘 글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된다. 함께 언급이 되는 게 죄송할 정도로 이 책 신형철의 글은 위대하고 숭고하다. 그가 대상(영화)을 대하는 태도는 철없는 감성으로 에세이 한 권 출간해 작가 소리 듣고 싶은 문학소녀의 낭만과 정확히 반대에 위치해 있다. 역시 좋은 문장은 깊은 생각에서 나오는 게 맞다. 가진 게 부족하면 글쓰기의 세계에서 금방 탄로가 날 수밖에 없다. 작가는 통찰력으로 대상에 대한 내용을 갖추는 게 우선이다.
형식적 측면에서는, 문장의 적절한 길이와 한자어의 적확한 사용을 들 수 있다. 나는 오래전 김훈의 문체를 흠모해 필사를 오래 한 적 있는데 지금은 그의 글을 따라 쓰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물론 배운 것은 많지만 내가 도달해야 할 이상적 스타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허세 없이 담담하게 쓰면서(글 좀 쓴다고 하는 사람들 특유의 허세 부리는 문장이 있는데 그렇다고 김훈이 그런 스타일이라는 건 아니다.) 적확한 단어(특히 한자어. 왜냐하면 한국어는 뜻을 명확히 하려면 결국 한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를 구사해 문장의 무게감을 잃지 않는 글을 좋아하는데 픽션에서는 이승우가, 논픽션에서는 신형철이 그러한 것 같아서 이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는 게 영화 본 것처럼 즐거웠던 것이다. 그의 다른 저서 <몰락의 에티카>를 처음 읽었을 때 받았던 기쁨과 반가움을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그가 쓴 문장은 내가 이전에 봐왔던 문장과는 조금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뭘 아는 사람이 쓴 느낌. 플로베르의 일물일어를 숭배하는 것처럼 단어 하나에도 철저한 것. 너무 진지해지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본인 혼자 짊어진 것처럼 중2병스러운 문체가 될 수도 있는데 충분히 진지하면서도 절대 그런 쪽으로 빠지지 않은 것. 물론 그가 서울대 박사 출신이라서 그렇게 훌륭한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적잖이 생각하지만 ― 즉 내 말은 인간 자체와 그의 문장이 분리될 수 없다는 뜻이지만(수준 높은 놈이 훌륭한 글을 쓰고 수준 낮은 놈은 한 단락도 못 쓴다.) ― 어쨌든 그의 결과물은 글짓기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선사하고 이 정도는 써야 밥 먹고 살아갈 수 있다는 채찍과 당근을 제공한다.
신형철처럼 쓰는 것. 내가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결심하는 것이다.
나는 영화 글을 잘 쓰고 싶기 때문에 이 책은 두고두고 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