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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ine 육은주 Oct 20. 2023

선비 칼을 들다

선비, 칼을 들다

 

조선의 암군으로 흔히들 선조, 인조, 고종을 꼽는다. 각종 기행과 스캔들로 인해 왕의 칭호를 후에 추존받지 못한 연산, 광해 등의 왕세자들도 있지만, 위에 든 세 왕은 본인들의 성정의 문제와 아랫사람을 담는 그릇의 크기, 국제정세를 보는 시각의 결여에 있어 조선을 암울한 위기로 몰아넣은 대표적인 혼군으로 손꼽힌다. 

선조는 임란을 극복했다는 이유로 선조대왕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지만, 이순신 장군을 대하는 그의 옹졸함과 치졸함, 임란이 끝난 후 보여준 논공행상 등에서 부조리의 끝을 보여준다. 임란이 끝난 후 가장 크게 공을 치하받고 큰 상을 받은 신하들은 바로 임란이 터지자 마자 선조와 함한께 한양을 버리고 함경도 의주로 피난갔던, 실질적인 국란 극복보다는 임금만을 충실히 수행했던 신하들이었다. 사극에서 말끝마다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어서 결국은 아무것도 할수없게 만들고, 끝에는 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울부짖으며 맺는 그 신하들이 단지 도망치는 임금을 수행했다는 이유로 나라를 실제로 목숨바쳐 지킨 이들보다 높은 공을 하사받았다. 정작 가장 먼저 왜군을 발견하고 격퇴시키며 첫 승리를 기록한 자발적인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한 57인의 선비출신 의병장들은 두세 등급 낮은 공을 하사받았다. 곽재우 장군과 그를 따르는 선비들은 왜군이 동래성을 침략한지 불과 29일만에 의병을 일으켜 왜군이 전라도가는 주요 길목인 의령 정암진 전투에서 불과 50명으로 2000명의 적과 대적해 그 길목을 지켜냈다. 그후에도 붉은 옷을 입고 신출귀몰하며 홍의장군으로 백성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경남 의령에 있는 박물관에는 이들 곽재우 장군과 이를 따르던 의병장들의 유품들과 그들이 지은 시문집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필자가 가장 놀랐던 것은 그들 모두가 평상시에는 시를 읊고 글을 읽던 선비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우리 역사 교육에서 의병들은 그저 고장을 지키기 위해 나선 양민들이나 스님들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필자의 고정관념을 뒤짚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새로웠다.

또 곽재우 장군의 생가도 그대로 의령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근동에서 가장 큰 만석꾼의 집안이었다. 전쟁은 무릇 경제력이 바탕이 되어야, 즉 돈으로 하는 것이다. 곽재우 장군이 사재를 털어 병사들을 일으킬 만 했을 정도로, 그것이 충분히 납득이 갈 정도로 생가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또 생가를 찾는 이들을 맞아주는 솟을대문앞에 자리하고 있는 수백년 묵은 고목 또한 그 위엄과 권위를 보여주는 듯했다. 곽재우 장군은 청나라를 자주 방문하고 신문물을 접하고 왜와의 전쟁 등을 그 남쪽 지방에서 홀로 대비할 만큼 국제 감각이 있었다.  

흔히 문약함으로 표현되는 조선의 선비들은 결코 문(文)만을 지향하지 않았으며, 육체적인 수련 수행 또한 중시했다. 칼을 들고 문무를 겸비한 완성형 인재, 현대적인 의미로는 르네상스형 인간을 지향했다. 그런데 문반과 무반으로 이루어진 양반 사회에서 문반이 그 현란한 글과 말, 권모술수 등으로 왕의 지근에서 권력을 잡았고, 그 권력을 누렸으며, 무반은 상대적으로 권력에서 소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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