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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ine 육은주 Oct 20. 2023

'유리의 성'의 '사랑과 진실'

프롤로그

일본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에 본 만화 ‘유리의 성’이 떠오른다. '유리의 성'은 와타나베 마사코 작가의 장편 만화로, 국내에서는 어린이 잡지 '새소년'을 통해 공개되었다. 김수현 작가는 1984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인 ‘사랑과 진실’을 통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지만, '사랑과 진실'은 방영 직후부터 '유리의 성'과 줄거리, 캐릭터, 플롯 등이 비슷하여 표절 의혹도 일기도 했었다. 

 

유리의 성은 영국을 배경으로, 사랑과 진실은 1960년대의 한국을 배경으로 했기에 두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은 다르다. 그러나 두 작품의 설정과 줄거리는 매우 흡사하다. 두 작품에서는 공통적으로 한 자매가 등장한다. 유리의 성에서는 언니 이사도라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동생 마리사가 스트라스포드 백작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과 진실에서는 교통사고로 인해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가 쌍둥이 자매 중 첫째인 효선이 사실은 재벌가의 딸이라는 사실을 언니 효선이 아닌 동생 미선에게 털어놓게 된다. 이렇게 진실을 먼저 알게 된 두 작품의 등장인물은 이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고, 자신이 마치 잃어버렸던 친딸인 양 행세한다. 이렇게 진짜 딸의 지위를 가로챔으로써 엇갈린 자매의 운명과 이후의 인생 여정이 두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사랑과 진실’의 악역 미선은 거짓을 연기하며 큰 부와 안정을 누리지만, 한편으로는 진실이 드러날까 늘 불안에 떨며, 언니와 언니의 친부모가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방해를 한다.

 

이렇듯 작중 거짓으로 언니 행세를 하는 동생 미선의 모습을 떠올리자면 일본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우리의 철학, 전통 및 각종 기술을 빼앗아가 동양문화의 대표 주자로 행세했다. 이후 근대화까지 빠르게 성공한 일본은 오랜 기간 G7의 유일한 아시아 파트너로서 활동하며, 아시아 유일의 선진국임을 강조해왔다. 

  

일본이 빼앗아 간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 한국과 일본이 삶을 대하는 본질적인 태도의 차이를 낳은 것은 바로우리의 얼, 즉 철학이다. 한민족은 1592년(선조 25)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도자기 기술과 여러 학문적 전통을 빼앗겼고, 그 후 일제 강점으로 나라도 빼앗겼고, 우리의 말과 글자도 잃을 뻔했다. (이 역사는 이어져) 최근세의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몇번의 전란으로 우리 문화와 전통의 맥은 거의 끊길 뻔한 위기에 처했었다. 실제로 고려시대에 화려했던 청자 도자기 기술, 조선의 청화백자 기술은 임란 전후로 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다.어디 자기 제작 기술 뿐이랴, 한국이 일본에 빼앗긴 것 중에서 가장 뼈아픈 것은 퇴계 이황의 철학이다.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그는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그의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그의 학문 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황은 자신의 철학을 70년 생애를 통하여 실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지역의 서적과 도공 등이 상당수 약탈당했는데, 이때 이황의 저서가 상당수 약탈당하였다.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 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8세기 미국에 의해 서구 문물이 강제로 유입되기 전까지 일본에서는 조선에서 전래된 이황 계열의 성리학이 막부세력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유행하였다.

 

도자기 기술도, 퇴계사상도 왜 우리는 놓쳤고, 일본은 현대화에 성공했을까?

일본은 보는 눈이 남다르다. 고래로 섬나라로 문화에 뒤떨어져 있던 일본은 배우는 일에 힘을 기울이는 문화를 지닌다. 일본인은 겸손한 자세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늘 목말랐고, 그 자세의 일관성이 거듭되어 어느덧 도가 트였다. 일본에선 뭐든지 도가 된다, 바둑도 도, 검도, 유도, 차 마시는 것도 도, 꽃꽂이도 도가 된다. 이처럼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 심미안, 선구안 역시 하나의 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리학에서 좋은 쪽으로 소화한 퇴계의 유교철학 중에서 좋은 것을 취하여 자신들의 근대 생활규범, 생활철학으로 삼은 것이다.

일본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내선일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이란 나라와 우리 민족을 대일본제국으로 동화 흡수시키고 그 존재마저 지우려 했었다. 현대에 들어서도 일본은 한국을 애써 무시하고 지우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일본의 민족적 정체성의 뿌리는 고대 한국, 즉, 고조선, 백제, 가야 등 한반도 여러 갈래에서 시작되었고, 영향 또한 지속적으로 받았다. 일본은 이를 부정하고, 일본 언어와 문화를 일본 독자적인 문화라고 왜곡하는 노력을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그러나 표나지 않게 계속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저명한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조차 자신의 책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에서 일본을 동양의 독자적인 문화권인 ‘일본 문화권’으로 따로 중요하게 분류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어이없는 일이 국제 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한두 사례가 아니다. 최근, 세계 언어의 뿌리를 어떻게 분류했는지 구글 검색으로 우연히 찾아볼 일이 있었다. 일본어는 따로 일본어족으로 독자적으로 분류되어 있고, 한국어는 '미상 (missing)'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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